Chapter Text
디스티의 불로불사 시술을 받으면 살기 위해 그의 피로 만든 혈청을 필요로 하게 된다.
혈청을 얻지 못하고 한계에 다다르면, 순식간에 늙어 죽어버린다.
디스티의 조수이자 가장 오랜 심복 니켈도 예외는 아니다.
끝이 다가온 것을 예감한 니켈은 약속한 대로 열차에 연락해서 테슬러와 코일, 패러데이를 연구소로 찾아오게 해주었다.
그렇게 세 사람과 쥐돌이와 AI 케시우스가 보는 가운데 니켈은 임종을 맞이했다.
“안녕. 니켈.”
테슬러가 시신에 흰 천을 씌우자 패러데이가 제일 먼저 돌아섰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래.”
패러데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인 걸 테슬러와 코일 둘 다 모른 척 해주었다.
자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던 죽음이, 결코 편안하지 않은 모습으로 실현되는 광경을 본 충격이었다. 어설픈 위로를 생각하는 대신 니켈의 시신을 관에 넣고 봉하는 일부터 했다.
“니켈 님은 자기 시신을 연구소에 포르말린 표본으로 보관하거나, 지하벙커에 매장하거나, 사막에 매장하거나 혹은 화장해 재를 뿌리거나 편한 대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AI 케시우스는 여전히 살아있을 때의 그보다 훨씬 딱딱하고 감정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니켈이나 쥐돌이와는 달리 이쪽은 여전히 로봇이라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니켈이 유일한 말동무였을 텐데.”
혹시라도 탈출하려 들까봐, 쥐돌이를 돌봐주되 하는 말은 전부 무시하라는 것이 테슬러의 명령이었다. 달리 상대가 없어서라도 나름대로 니켈과 친해지지 않을까 했던 예상이 빗나가자 코일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디스티를 되살리게 해줬으면 니켈이 죽을 필요도 없었잖아요.”
쥐돌이는 보다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헤르츠는 니켈을 잘 보살펴달라고 했는데......죽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역시 너무해요, 여러분.”
“니켈이 살고 싶었다면 케시우스의 눈을 피해 널 풀어줬겠지.”
테슬러가 니켈의 관에서 몸을 돌렸다.
“이건 니켈이 택한 운명이야. 정말 그를 아꼈다면 그의 뜻도 존중해 줘야지.”
“예, 여러분은 이제 니켈의 장례를 치르고 떠나버리면 되니까요.”
쥐돌이가 투덜거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디스티는 니켈도 없이 여기서 근육바보와 함께 종신형을 사는 거고요. 잘 가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 아니, 못 나가죠.”
테슬러가 쥐돌이 앞에 다가와 섰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을 보고 쥐돌이가 찔끔 했다.
“뭐, 뭡니까. 어차피 얌전히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이 작은 쥐가 듣기 싫은 소리 좀 했다고 혼내기라도 할 건가요? 이거 동물학대예요!”
“안 혼내.”
테슬러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쥐돌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을 뿐이야. 그동안 니켈이 지하 벙커에서 연구도시의 남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는데 그건 어디서 볼 수 있지?”
“호오.”
쥐돌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렇게 나와야 우리 총통님이죠. 친구의 임종을 지키는 겸사겸사 연구도시의 지식도 얻으러 왔단 말이죠?”
“저게......”
코일이 쥐돌이를 노려보았다.
“테슬러가 넌 줄 아냐. 니켈이 죽어서 슬픈 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 유품 좀 정리하겠다는데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해?”
“됐어, 틀린 말도 아니고.”
테슬러가 코일을 말렸다.
“하지만 난 그 지식이 꼭 필요해. 디스티가 개조하고 정비해주던 병사들은 이제 나만 쳐다보는 중이고, 열차의 성능도 아직 안주해도 될 때가 아니야. 있는 지식을 그냥 묵혀두는 건 네 생각에도 낭비 아니야?”
“그렇긴 하죠.”
쥐돌이가 속 모를 미소를 지었다.
“연구도시의 지식은 금기라느니 하는 소리는 총통님께는 해봤자겠죠? 이미 그 유물을 활용해 열차까지 만드셨으니.”
“그래.”
“예, 니켈의 자료는 연구실과 서재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언제든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디스티의 비망록을 먼저 읽어보셨으면 하거든요.”
“비망록?”
테슬러가 표정을 약간 찡그렸다.
“일기장처럼 쓸데없고 시시콜콜한 내용이라면 굳이 보고 싶지 않은데.”
“아니에요. 절대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쥐돌이가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신형 엔진을 가지고 여기 마지막으로 와서 남긴 건데 언젠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라고 했어요. 분명히요!”
테슬러는 잠시 망설였다.
“디스티가 나한테 하고 싶어한 말이라면 그가 남긴 동영상에 다 있었어. 그 후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기도 했고. 그런데 더 남았다는 거야?”
“글쎄요. 얼굴 보고 직접 말하기 힘든 비밀이라는 것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분명 당신 자신의 비밀이랍니다.”
안경 속, 디스티와 같은 빛깔의 눈이 코일에게 옮겨갔다.
“사실은 코일 대위에게 이미 설명한 적 있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대위님은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테슬러가 코일을 돌아보았으나 코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원래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는 들었다는 기억도 남지 않는 법이죠.”
쥐돌이의 태연한 얼굴을 훑어보다가 테슬러가 물었다.
“그 비망록은 어디 있지?”
“서재의 검은 색 책장 맨 오른쪽에 꽂힌 빨간 색 다이어리랍니다.”
곧바로 검은 색 책장을 찾아가는 테슬러를 보고 코일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이어리 좀 읽는다고 테슬러가 해를 입을 리는 없었다. 수상한 물건이라면 니켈이 알아서 치웠을 것이다.
마침 연구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빨간 색 다이어리를 찾아내 읽기 시작한 테슬러, 여전히 특제 주택에 잘 갇혀있는 쥐돌이를 확인한 코일이 누가 들어왔나 보러 서재를 나갔다.
“미안. 기다리게 했지?”
들어온 사람은 역시 패러데이였다.
“장례는 어떻게 할까? 니켈이라면 지하벙커의 연구도시 유적에 디스티의 유품들과 함께 묻히고 싶어할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불로불사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패러데이는 아직 건강하고 나이 먹은 티도 잘 나지 않았다. 실력은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역시 니켈도 패러데이와 같은 선택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코일이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젠장, 왜 고작 디스티 같은 놈 때문에......”
“그러게나 말이야.”
패러데이가 휴대용 술병을 꺼냈다. 술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코일은 그때에야 패러데이가 이미 좀 마셨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날이니 대위님한테 한 잔 권한다고 해서 총통님한테 혼나지는 않으려나? 아니, 관둘래. 이거 어린애가 마시기엔 너무 독해.”
“안 마셔.”
코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냥 장례 치르면서 니켈한테 부어 줘. 테슬러도 술 안 좋아해.”
“하기야 둘 다 술 좋아할 입맛은 아니더라.”
마개를 쥐고 잠시 망설이던 패러데이가 그걸 여는 대신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이제는 절제를 해야겠지. 진탕 마셔도 되는 시절은 지났으니까. 그런데 테슬러는 어디 있어?”
“응, 디스티가 남긴 비망록인지 뭔지 하는 거 읽어본대.”
“그래?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재에서 뭔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테슬러의 비명이 들렸다.
“코일!”
“테슬러!”
코일이 득달같이 서재로 뛰어들었다.
테슬러가 책장 아래 주저앉아 있었다. 빨간 색 다이어리는 바닥에 케이스를 위로 향하고 떨어져 있었다.
겉보기에 다친 곳은 없었으나, 자기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두 눈도 꽉 감은 채 새하얗게 질려 떨고 있었다. 코일은 테슬러를 감싸 안으며 쥐돌이를 노려보았다.
쥐돌이는 여전히 전용 주택 안에 갇힌 채 속 모를 미소만 짓고 있었다.
“코일?”
테슬러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응, 나야. 괜찮아?”
“내 입을 막아 줘,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응!”
반사적으로 테슬러의 입을 틀어막고서야 왜 쥐돌이가 아닌 테슬러 자신의 입을 막아달라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그러나 테슬러가 여전히 떨면서 자신에게 기대고 있으니 섣불리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뭐야, 무슨 일 난 거야?”
뒤따라 들어온 패러데이도 어리둥절해서 물었으나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결국 다시 쥐돌이를 노려보았다.
“너! 테슬러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가요? 여기 갇혀서요?”
쥐돌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총통님은 그저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시는 것뿐이에요. 결국에는 괜찮아질 겁니다. 음......그 ‘괜찮다’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분에게는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오겠지만요.”
“무슨 헛소리야!”
테슬러의 입을 막은 채로 코일이 외쳤다.
당장이라도 열차 부엌에 나온 시궁쥐 때려잡듯 때려잡고 싶은데 테슬러는 여전히 두 눈 꽉 감은 채 귀도 틀어막고 있었다. 입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움찔거렸지만 명령이 있으므로 힘주어 틀어막았다.
자기 입을 막아달라고 할 때는 그럴 이유가 있는 거다. 적어도 테슬러가 눈을 뜨고 귀 막은 손도 놓을 때까지는 계속 붙들고 있기로 했다.
테슬러는 정신 못 차리고, 디스티는 뜻 모를 소릴 하며 음흉하게 웃는다. 처음 이 연구실에 찾아왔을 때가 생각나 코일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였다. 테슬러를 멋대로 마취시켜 놓고, 이유를 다 듣고 나면 마치 코일이 자기를 이해해줄 것처럼 디스티가 떠들었을 때.
황당한 소리라고 들어넘겼기 때문에 정말로 그때 들은 말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디스티만 아는 테슬러의 비밀이라는 게 뭐야?’
“제 말을 들으면 코일 대위도 기분이 바뀔 거예요...... 아하하~”
수술대에 테슬러를 눕혀놓은 채로 디스티가 웃었다.
과연 코일 대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크게 기대가 되지는 않아요. 그래도 한 번 말이나 해보고 싶군요.
총통 테슬러의 최측근, 소꿉친구, 유일하게 남은 가족에게 과연 이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거든요.
어디부터 시작할까......역시 내가 테슬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해야겠죠?
“드디어 테슬러를 손에 넣었다! 크하하하하!”
그라바 요새의 연구실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고 디스티는 피투성이로 실신한 테슬러를 바라보았다.
소문이 과장되었을 각오도 했다. 나이를 먹으며 달라졌을 각오도 했다.
전부 필요 없는 각오였다. 클라프로트와는 대조적으로 어머니만 쏙 뺀 그 외모는 시네아를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간 기분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몇 군데 드물게 달라진 부분도 전혀 어색하거나 미모를 손상시키지 않아서 이제 시네아를 재탄생시키기 위해 고쳐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저런 날카로운 눈매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눈 밑의 음영도, 시네아하고는 다르게 색기가 흘러서......음, 저건 좀 요사스러운 느낌이네.’
한동안 잊고 있던 꺼림칙한 느낌이 그의 등줄기를 훑었다.
‘맞아, 테슬러도 연구도시의 지식에 손을 댄 연구자였지.’
석방되고 다시 황궁 의사 직함을 달자마자 시네아의 시신을 찾는 한편 테슬러의 정보도 최대한 긁어모았다. 프로젝트의 성사를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클라프로트도 막지 못했다.
시네아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들이 살던 빈민가는 싹 밀리고 제국군 산하 시설이 들어서서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테슬러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같은 건 다 황궁에서 조사해야 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역시 그가 연구도시의 유물을 가지고 무한동력 열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엔진의 미니어처를 분석해서 그렸다는 설계도를 펼쳤을 때 깨달았다. 테슬러는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이 금기의 지식을 깨우쳤다고. 이 세상 너머의 진실을 엿보고 연구도시 연구자들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