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루실리카와 아슬란이 복귀하고 유니버스에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카멜롯의 일원이 그들을 따라왔다.
그저 포로로 취급하기에는 폐허에서 튕겨 나온 아슬란을 그가 치료해주었다 한다. 그렇다고 우리 편이라고 믿기에는 그가 확실히 전향 의사를 밝힌 것도 아닌데다 카멜롯이 기만전술을 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로드는 일의 전말을 파악하기 전까지 카멜롯의 라플라스를 구속해두기로 결정했다. 루실리카도 라플라스 본인도 동의해서 당장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감옥이라기보다는 그냥 좁은 방 같은 곳에 갇혀서 라플라스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라플라스?"
나인이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괜찮아? 불편한 덴 없어?"
"...상황이 열악하니 감옥이 없는 건 이해하지만 방문 정도는 잠가야 하지 않을까요?"
"잠겨 있었어. 내가 열었어."
나인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있지, 아까 아슬란 치료해줘서 고마워."
"병 주고 약 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 전혀 고마울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병만 주고 약을 안 줄 수도 있었잖아. 잘못했어도 안 도망가고 책임을 지면 잘한 게 맞다고 그랬어."
애들 가르치는 말로는 옳은 소리라 라플라스는 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배고프진 않아? 그게 유니버스 내에선 이슬이 안 맺힌대서.."
"괜찮습니다. 그보다..."
라플라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응? 뭐가?"
"더러운 손 치우라고 한 거요."
"아..."
나인이 잠깐 풀이 죽었다가 다시 표정을 밝게 했다.
"그거 사과하는 건, 날 정말 미워하는 건 아닌 거지? 다행이다."
"적이라도 미움 받는 건 싫습니까?"
"응? 그야 미움 받는 건 싫지. 그냥 적도 아니고 라플라스잖아."
라플라스가 미간을 모았다.
"저는 당신의 유전정보의 근원이 된 그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상 상관없는 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치만... 남이라도 라플라스잖아."
라플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말없이 나인을 바라보았다.
"......저...."
"생김새가 어떻든 남은 남입니다. 여기선 친했던 상대라도 다른 세계에선 적일 수 있지요. 지금같이 여러 세계의 인물들이 병립하는 상황에서 그런 생각은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나쁜 사람에 의해 크게 마음을 다칠 겁니다."
나인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그건 자기소개입니까?"
라플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조금 열려있던 문 밖에 라샤드가 서 있었다.
"...당신은."
"엘펜하임의 제 3 마탑주인 알 라샤드입니다. 카멜롯의 라플라스를 보러 왔습니다."
그가 라플라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인을 보았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를 피해주겠어요?"
"어..."
나인이 라플라스와 라샤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라플라스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갔다.
"라플라스에게 화내려는 거야?"
라샤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면 안됩니까?"
"라, 라플라스는 반성하고 있어!"
나인이 라플라스의 앞을 가로막듯이 섰다.
"그런가요? 저 보기에는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데요."
라샤드와 라플라스의 눈이 마주쳤다. 라플라스가 눈에 보이게 긴장했다.
"제가 당신에게도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건 꽤나 뻔뻔한 발언이군요. 카멜롯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라샤드가 방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엘펜하임은 석화되고 저는 바레타와 또 다른 라샤드를 잃었습니다. 거기에 당신 책임은 없다고 생각합니까?"
"..."
라플라스가 시선을 피했다. 라샤드가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카멜롯의 라샤드에게는 저도 관심이 있는 터라 오간 대화를 자세히 분석해보았지요. 그러니 알겠더군요."
라샤드가 라플라스에게 말했다.
"당신은 잘못을 뉘우친 것이 아닙니다."
나인이 뭐라 항의하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라플라스가 더 빨랐다.
"그런 이야기는 제가 아니라 이곳의 맹주에게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당신이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라샤드가 옆으로 몸을 옮겨 다시 라플라스의 시야 안으로 들어갔다.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자기 세상에서 도망쳤듯이."
라플라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당신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붙은 것도 아니지요. 정에 흔들려서? 당신들이 멸망시킨 다른 세계에는 루실리카 나인 아슬란이 없기라도 했습니까?"
라플라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라샤드는 말을 이었다.
"그저 실패에서, 실패에 따르는 비난에서 도망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라샤드를 따라가지 않고 여기 남은 거면서."
"예, 맞습니다."
라플라스가 고개를 들어 라샤드를 노려보았다.
"제가 유약하고 비겁한 자라 실패를 감당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기왕 포로로 끌려올 거라면 조금이라도 잘 보여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슬란을 치료했고요. 이제 만족스럽습니까?"
그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누가 라샤드 아니랄까봐 그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오,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바로 욕을 하다니. 교육자인 라플라스님은 어디로 간 겁니까."
"교육자요?"
라플라스가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르쳤던 아이들에게 배척당하고 내쫓겼는데 그런 게 남아있을 리가 있나요."
라샤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실망시키는군요."
라플라스가 한 대 맞은 듯 몸을 움츠렸다.
"어... 어..."
나인이 라플라스를 감싸고 싶은 듯 손을 움찔거렸다.
"그, 그렇게 심하게 말 할 필요는..."
"아뇨. 그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요."
라플라스가 나인을 밀어냈다.
"그야 실망스럽겠죠. 당신이 봐온 라플라스는 훌륭한 지도자이자 교육자일 텐데, 이런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같은 이름과 얼굴을 달고 있으니 거슬리는 심정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팔을 움켜쥐었다.
"그 라샤드도 늘 그 얘기 했지요."
"끝까지 이렇게 나올 겁니까?"
라샤드의 눈빛이 험해졌다.
"혹시 이렇게 죄로부터 도망쳐서 숨어있다 우리가 져서 이 세계와 함께 소멸해 버리면 그걸로 속죄가 된다,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라플라스가 눈을 꽉 감았다.
"제가 아는 건 전부 말할 거고 당신들이 무엇을 시키든 군말 없이 따를 겁니다. 뭘 하든 잘 할 자신은 없지만 버려도 괜찮은 목숨은 쓸 곳이 있겠지요."
"그건 우리 맹주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가요. 여기서도 그 사람은..."
"제가 원하는 바도 아닙니다."
"...네?"
라플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듣자하니 아까부터 그 라샤드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계시군요. 그자가 그러던가요? 당신은 쓸모없고 유약하고 비겁하고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고? 가치 없으니 버려도 괜찮다고?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까?"
라플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당신이, 도망을 그만두고 완전히 우리 편이 되어 같이 살게 되길 바랍니다. 이 사태가 끝난 다음에도요."
".....네?"
라플라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그럴 생각이 있습니까?"
라샤드가 재차 압박했다. 한참 정처 없이 눈빛이 흔들리던 라플라스가 나인을 돌아보았다.
"예...있긴 합니다만 제가 무슨 도움이."
"그런 말을 빼고요."
".....네."
라플라스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카멜롯을 완전히 떠나, 이 곳에 합류해서.... 그, 그 이후는 지금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만..."
라플라스가 라샤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더 화내는 것 같지는 않아서 라플라스는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
"그렇지만.... 왜요? 그것도 당신이."
"왜라..."
라샤드가 미간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아무래도 제 말재주와 얼굴로는 말 해 봐야 오해만 계속 쌓일 것 같군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게 낫겠네요. 맹주를 참칭하는 것 같아 말하지 말까하고 있었지만 그분이라면 이해해주시겠지요."
라샤드가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라플라스 셀케나, 아발론 동맹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남들이 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아닌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하세요."
라플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제가 엘펜하임으로 망명할 때 해주신 말이지요."
라샤드가 조금 미소 지었다.
"다행히 그곳에서도 똑같았군요."
라플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샤드는 할 말 끝났다는 듯 방을 나갔다.
라플라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인이 놀라 그에게 달라붙었다.
"라플라스... 울어?"
라플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손아래로 눈물이 넘쳐 나오고 있었다.
"라샤드땜에 그래? ..혼내줄까?"
"아뇨.. 아니."
라플라스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 그랬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고...."
뭘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나인은 라플라스를 끌어안았다. 나인을 마주안고 라플라스는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