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청야성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는 언제나 엄격한 군대식 일정에 따라 돌아갔다.
공작 본인이 세운 원칙에 예외란 없었다. 단 1분 1초라도 어기면 자신의 장남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날이라 해도 저녁식사 시간은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시종은 자신의 일진을 탓하며 일단 서쪽 정원으로 나갔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화를 삭이고 있을 공작을 먼발치서 확인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지상에서 먼저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엉성해서 톡 건드리면 부서지겠다고 고용인들끼리 수군거리던 발코니 난간이 정말 부서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공작과 함께.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가 헛것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는 엄마 찾는 아이처럼 집사에게 달려갔다. 집사는 곧 발코니 아래로 달려가 시종이 악몽을 꾼 게 아님을 확인했다.
공작을 따라 참전해본 경험도 있는 집사는 보다 침착하게 행동했다. 이미 살려내기엔 늦은 것을 맥박을 짚어 확인한 다음 공작부인과 후계자인 장남에게 이 상황을 알리게 했다. 시종들이 뛰는 동안 현장은 본인이 지키며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공작부인은 차남의 방에 있다가 비보를 듣고 나와 현장을 확인했다. 아직 어린 둘째는 아버지의 끔찍한 시체를 보고 기절했다.
그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은 큰아들을 찾기 위해 저택 전체를 뒤지던 고용인 중 한 명이, 아직까지도 발코니 난간이 달려 있던 공작의 서재에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큰아들이 거기에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차피 사고의 현장을 확인해야 하므로 서재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서재 문을 열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유령처럼 우뚝 선 청야성 공작가의 장남, 청야성 백작 플루토였다.
“테슬러, 나 왔어.”
코일이 사무소에 돌아왔을 때 테슬러는 신문에 한창 열중해 있었다.
“진디캔디랑 우유 사왔으니까 셰이크 만들어줄게...... 뭐 봐? 흥미로운 기사라도 있어?”
코일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청야성 공작의 사고사 소식에 며칠 전부터 난리이긴 한데 테슬러와 자신까지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그 외에는 신문에 탐정이 신경 쓸 만한 사건 사고는 딱히 없었다.
“청야성 공작이 사고로 죽은 게 아닐 수도 있대.”
테슬러가 신문을 코일 쪽으로 밀어주었다. 굵직한 헤드라인이 그의 눈에도 들어왔다.
[공작가에 흐른 피의 충격적 내막 - 장남이 아버지를 죽이다!]
일부러 자극적으로 쓴 헤드라인이 분명하지만 테슬러가 내밀었으므로 일단 읽었다.
공작이 추락한 게 낡은 발코니 때문에 벌어진 사고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장남의 짓이었으며, 부자지간은 원래 살벌하기 그지없었고 경찰도 험악하게 취조중이라는 내용이 최대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투로 나열되어 있었다.
“이거 진짜야?”
그 저급한 논조에 눈살 찌푸리면서도 코일이 물었다. 탐정이면 이런 기사라고 신경 끄고 살 수 없었다.
“헤드라인은 이렇게 써놓고 본문에 체포되었다는 말이 없잖아. 그냥 제목 낚시 아니야?”
“진짜일 수도 있어.”
테슬러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나라에 셋밖에 없는 공작가 중 하나야. 혐의가 보통 뚜렷한 게 아니면 경찰이 취조는 고사하고 근처에도 못 갈 가문이라고.”
혐의가 있어도 신중하게 수사하는 이유가 무고한 사람 해칠 위험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귀족을 떠받들기 위해서라는 말에 코일은 마음속으로 벌써 그 공작가 장남을 목매달아 버렸다.
“그래도 존속살해니까 제대로 수사할 거야. 형량도 무겁게 나올 거고.”
코일이 무슨 생각일지 잘 아는 테슬러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야 피해자도 귀족이고 무려 아버지씩이나 되니까 그런 거지. 죽은 사람이 평민이었어봐.”
코일은 계속 투덜거렸다.
“그야 그렇지. 이런 수준의 기사라도 기사 낸 곳이 있다는 게 용할 지경이고. 제대로 된 기사는 아마 교수대가 선 다음에야......”
작은 종소리에 테슬러가 입을 다물었다.
사무소는 2층에 있지만 1층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울리게 장치해놓은 종이었다. 테슬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작은 액자 하나를 밀고 잠망경을 드러냈다.
“너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보이는 귀족 도련님 한 명이야. 시종 하나 안 달고 왔어.”
액자로 잠망경을 도로 가리고 자리에 앉아 손님 맞을 준비를 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테슬러 탐정 사무소입니다. 들어오세요.”
들어온 사람은 잠망경에 비쳤던 소년이었다.
잿빛 우단으로 된 코트에 보석 박힌 은사슬 장식은 고급품 보는 안목이 전혀 없는 코일의 눈에도 굉장히 비싸보였다. 그러나 소년의 창백한 피부와 가냘픈 몸집 탓인지 상류층의 위압감이나 기품보다는 위축되어 보이는 인상이 더 강했다.
테슬러의 책상 맞은편에 위치한 손님용 의자에 앉는 자세도 엄마한테 혼나러 온 아이 같아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테슬러입니다. 이쪽은 내 조수 코일.”
테슬러가 먼저 운을 떼자 소년이 망설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범죄 수사 전문 탐정이라고 들었어요.”
“다른 일이라고 전혀 안 하는 건 아닙니다만 가장 잘 하는 건 그거죠. 그보다 목소리를 좀 키워 주면 더 기꺼이 의뢰 받을 마음이 날 겁니다.”
“아, 예!”
저런 태도 때문에 의뢰인이 화를 낸 적도 몇 번 있는데 이 의뢰인은 화가 나지 않은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실은 저희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데 경찰 조사 결과, 사고가 아닌 타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범인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어요.”
코일이 테슬러를 쳐다보았다. 테슬러는 손님 얼굴만 보고 있었다.
“타살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 자식 손에 죽는 건 아니죠. 무슨 근거로 다른 사람 아닌 장남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게,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도 많이......”
다시 목소리가 작아지던 손님이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가 장남이라고 말을 했던가요?”
“안됐지만 이미 꽤 유명한 사건이 되었으니까요. 청야성 공작이 자기 집 발코니에서 추락사한 사건은.”
손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전 아버지를 떠밀지 않았어요. 그 발코니가 너무 오래돼서 수리해야 하는데 안 한 거라고요.”
“그런데 경찰은 믿어주지 않고, 그래서 탐정을 고용하려는 건가요?”
“예.”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손님이 아, 하더니 작은 상자를 꺼냈다. 명함 케이스였다.
“제 이름은 플루토입니다. 아시다시피 청야성 공작가의 후계자고요. 누명만 벗으면 크게 사례할 수 있어요.”
명함을 받아들어 살펴보던 테슬러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둘 게 있습니다. 첫째로, 나는 고귀하신 분들 떠받드는 법을 모릅니다. 둘째로, 경찰과 사이가 나빠서 볼썽사나운 꼴을 좀 보여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의뢰 받을 테니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시죠.”
“예!”
플루토가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예의는 지금 정도로 충분해요. 그리고 경찰과 사이 나쁜 건, 그래서 여기로 온 거예요. 경찰이 고압적으로 굴어도 휘둘리지 않는다면서요?”
“좋게 말하면 그렇죠. 그 정도로 경찰의 의심이 강해진 이유가 뭔가요?”
플루토의 어깨가 다시 처졌다.
“첫째로, 가족들 중에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게 저뿐이에요. 어머니도 동생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잘 따르는데, 전 그날도 아버지하고 싸웠어요. 언제나보다도 더 심하게.”
“흠.”
“둘째로, 아버지는 아무 이유 없이 떨어진 게 아니에요. 발코니에서 시가를 피우고 계셨는데 그 시가에 독이 묻어있었대요.”
“독?”
흥미가 돋은 듯 테슬러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독만으로 죽을 양은 아니었대요. 검시의가 유능하지 않았다면 검출 못 했을 극소량이었다고......그런데 담배의 독성과 합쳐져서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고, 그대로 난간에 부딪쳐 바깥으로 떨어진 거래요.”
“과연 누구라도 플루토 경을 의심할 만 하군.”
테슬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작의 담배에 독을 묻힐 수 있고, 발코니에서 담배 피우는 습관도 알고, 난간이 낡아 공작의 몸무게만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다 나름 동기까지 있단 말이지. 하지만 좀 요행에 기댄 것 아닌가? 공작이 안쪽으로 쓰러지거나, 난간이 보기보다 튼튼했다면?”
“난간을 한 번이라도 직접 봤다면 그 걱정은 안 하게 될걸요.”
플루토가 우물거렸다.
“발코니 자체가 굉장히 오래됐거든요. 거의 저택 처음 세웠을 때부터 있던 건데 나중에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도 그 난간은 건드리지 않았대요. 바닥은 작년에도 수리했는데, 그때 수리공이 난간도 수리해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아버지 고집이 더 세서 결국 바닥만 한 거예요. 그때 수리했더라면......”
“수리하면 저주받는다는 미신 같은 거라도 있었나보죠?”
상대에게 질문하느라 다시 존대로 돌아왔지만 테슬러의 말투는 여전히 예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플루토는 거슬려 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청야성 공작가가 과거에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는데, 당대의 공작이 청혼한 장소였대요. 그 청혼을 받아들인 공작부인 덕택에 가문이 고비를 넘겼다고 전해지고요. 그래서 공작가의 행운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어요.”
그의 얼굴에 서린 울음기가 슬픔 때문인지 억울함 때문인지, 혹은 더 교활하게 수를 쓰지 못한 후회 때문인지 당장은 테슬러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버지가 추락하신 뒤에 제가 서재로, 그러니까 그 발코니가 통해있는 유일한 방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목격되었어요.”
‘뭐야, 그럼 네가 범인 맞잖아.’라는 반응을 각오하듯 플루토가 고개를 푹 숙였다.
“거기는 왜 갔는데요?”
테슬러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고 물었다.
“‘내가 목격되었다’라는 표현 굉장히 이상한 거 알죠? 본인 시점으로 다시 제대로 설명하시죠.”
플루토는 고개를 들고 테슬러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전날부터 아버지와 크게 싸운 상태였어요. 아버지는 절 사관학교에 진학시키려고 했는데 저는 인문계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거든요.”
“그랬군요.”
“마침 아버지 생신이 얼마 안 남아서, 선물로 주문했던 고급 시가가 사건이 일어난 날 오전에 배달됐어요. 그걸 드리고 다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말도 못 꺼내게 하고 담배 상자도 집어던져 버리셨어요.”
그때가 떠올랐는지 플루토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집사가 그 담배를 주워서 아버지한테 다시 드리고 중재해보려고 했대요. 그랬더니 그걸 들고 발코니로 나가셨다고. 거기서 혼자 담배를 피우는 건 아버지의 오랜 습관이었으니까, 그래서 전......”
다시 고개를 푹 숙인 그는 거의 잘못을 빌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누그러지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재로 찾아갔어요......”
그 일이야말로 인생 최대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맹세하는데 전 담배에 독을 묻히지 않았어요. 밀지도 않았고요. 제가 갔을 땐 이미 아버지가 추락한 뒤였어요!”
갑자기 목소리가 달아올랐다. 오직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여기 온 사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