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옷차림도, 오늘을 위해 챙긴 준비물들도 완벽하다.
청야성 공작 플루토는 타운 하우스에서 가장 작고 눈에 안 띄는 마차를 골라 마부만 불러서 출발했다. 평소에도 시종이 붙어있는 게 거북했는데 오늘은 특히나 다른 사람 눈을 피하고 싶었다.
주소를 불러 주자 마차가 출발했다.
평소 속도로 한 시간 좀 넘는 거리. 하숙집과 상점이 빽빽이 들어찬 번화한 골목으로 들어와, 목적한 건물 앞에 마차를 세운다. 공작가의 화려함에 익숙해진 눈에는 초라할 정도의 건물에 혼자 들어간다.
계단은 삐걱이는 나무 계단이다. 벽에 드문드문 걸려 있는 액자는 조잡한 싸구려일 뿐이다. 싹 떼어버리고 이름 있는 장인의 작품들을 걸어주고 싶지만, 그보다는 곧 만날 사람을 여기서 들어다가 공작저에 앉히는 편이 더 좋다.
2층의 복도를 조금 걸으면 짙은 색 문을 마주하게 된다.
[테슬러 탐정 사무소]
문에 달린 작은 황동 간판을 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다. 탐정이라니 거친 사람일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막상 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만난 테슬러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겁에 질린 횡설수설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믿어주고, 백사자 공작에게 맞서 변호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이제는 주눅 든 용의자가 아닌 당당한 청야성 공작이 되어 여기 섰다. 떨리려는 손으로 꽃다발을 꾹 쥐고, 다른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테슬러와 코일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일부러 이번에도 약속을 잡지 않고 찾아왔는데 둘 다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랜만이야, 테슬러.”
꽃다발이 이들을 놀라게 할 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았던 걸까 신경쓰이는 걸 참고 일단 내밀었다. 테슬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걸 받아들었다.
보랏빛 꽃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품종에 푸른 꽃을 섞은 조합이었다.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배시시 웃었다.
“사무실에 그러고 보니 꽃병이 없네. 사다 놔야겠다.”
급한 대로 코일이 가져온 물병에 화사한 꽃다발을 꽂았다.
“드라이플라워로 만들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댔어.”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을 보태자 테슬러가 꽃다발 곁에 서서 다시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절로 입이 열렸다.
“예쁘다.”
원래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버버 하는 꼴을 보고 테슬러가 대답했다.
“응. 정말 예쁜 꽃다발이야. 고마워.”
옆에서 코일은 미심쩍다는 얼굴로 플루토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냐.”
고개를 세차게 젓고 간신히 원래의 용건을 생각해내는 사이 코일이 다시 물었다.
“또 누명이라도 쓴 거야?”
“아냐. 요즘은 그런 문제는 없어. 의뢰하러 온 건 맞지만, 그냥 평범한 경호 업무야.”
“경호?”
테슬러가 자리에 앉았다. 플루토도 마주앉아 가져온 신문을 내밀었다.
“여기, 1면 전시회 기사 봐줘.”
신문은 두 뭉치였다. 둘 다 권위 있는 예술 전문 신문인데, 하나는 이 나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 신문이었다.
“장미십자 살롱전?”
테슬러는 외국 신문을 집어들어 술술 읽어내려갔다.
“‘미술 평론가, 신비주의자로 유명한 펠라당 씨가 상징주의 사조를 이끄는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 첫 전시회를 연다. 신화 소재의 몽환적인 작품들이 현재의 틀에 박힌 예술계를 뒤집을 거라고 장담하며’......”
“그 전시회에 내가 후원을 좀 했거든.”
플루토가 헛기침을 했다.
“전시회는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열리니까, 이번이 청야성 공작이 된 뒤 처음으로 하는 해외여행이야. 그래서 외국에도 익숙한 경호 인력을 고용하고 싶어. 네가 귀국하기 전까지 클라프로트를 피해 살던 나라가 여기 맞지?”
“맞아.”
공작이 되어 이미 시종과 경호원을 여럿 데려갈 수 있는 그가 굳이 테슬러를 고용하기 위해 최대한 쥐어짜낸 이유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 일정을 비워놓을게.”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코일도 달력과 수첩을 확인할 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안내와 경호인가. 전시회만 참석하고 바로 돌아오는 거야? 아니면 다른 일정이 더 있어?”
“전시회 후원에 관해서는 펠라당 씨와 편지로 이야기를 마쳤고 수표 지불도 끝났으니 가면 다른 일 없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끝난 후에 그의 집에서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야. 그리고 바로 귀국해야 해.”
잠시 뜸을 들이다가 플루토가 덧붙였다.
“청야성 공작가에서 예술 전시회에 후원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흥미로 나서는 일은 없었어. 그래서 아직 사교계의 시선은 좋지 않아. 기왕 가는 거 그 나라의 예술을 좀 즐기고 오고 싶은데......”
“그래. 혹시 경호를 위해 더 알아둬야 할 건 없어? 널 위협하는 조짐이라든가.”
“그 정도는 아니야.”
선대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어린 새 공작에게 아직 불신의 시선이 강하지만 해외여행 한 번 못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예술과 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유명한 나라에 꼭 가보고 싶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출장 나가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일정을 짜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여행으로.
동경하던 나라에 테슬러와 함께 가서 같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파티도 가고,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걸 지금 사무실에서 마주보고 있는 테슬러도 눈치챈 것 같았다. 플루토는 망설임을 버리고 가죽 서류철에서 원고지를 꺼냈다.
“사실은, 나 요즘 시를 쓰고 있거든.”
테슬러의 눈이 동그래졌으나 눈살이 찌푸려지지는 않았다.
‘군인이 될 노력은 안 하고 글장난이라니!’
‘청야성 공작이 시나 쓴다고 해봐라. 온 나라가 비웃을 거다.’
‘에~ 이게 뭐야, 완전 유치해!’
그동안 가족들에게 들어온 어떤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해가며 슬쩍 원고지를 내밀었다. 테슬러는 거절하지 않고 그걸 받아가 읽기 시작했다. 곁에서 코일이 고개를 내밀자 그에게도 보여주었다.
“상징주의 스타일에 맞춰 쓴 거라 좀 난해하게 느껴질 거야.”
서류철 움켜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져온 원고는 대체로 꿈과 공상을 소재로 한 시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정의 꽃밭, 별빛이 쏟아지는 환상의 연못......
‘테슬러도 시를 좋아할까? 아니면 어쩌지? 취향이 안 맞으면? 유치하다든가, 너무 파격적이라든가, 더 현실적인 시를 써보라든가......’
원하던 대로 인문계 대학에 진학했지만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다. 요즘의 예술 사조는 너무 퇴폐적이라면서, 상징주의를 꿈과 환상에 빠져 현실도피 하는 한량들의 일탈 정도로 깎아내리는 교수도 있었다.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 비평 교수였다.
아버지 몰래 혼자만의 꿈과 환상을 기록해나가던 차에 접한 상징주의가 거의 자신을 위해 나타난 사조처럼 느껴진다고 밝힐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테슬러는 원고를 끝까지 읽고 돌려주었다.
“문장이 아름답네.”
“......그, 그래?”
“응. 난 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읽기 괜찮았어.”
너무 듣기 좋은 말이라 잠시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테슬러가 다시 신문에 눈길을 주었다.
“과연, 후원만 하는 게 아니라 너도 언젠가 이런 데 출품하고 싶은 거구나?”
“맞아.”
플루토가 열심히 끄덕였다.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이번 전시회도 그림만 출품되는 게 아니야. 시 낭송도 있을 거고 발레와 피아노 공연도 있어. 꿈과 환상의 세계에 속한 거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아. 이번에 난 그냥 후원만 했지만.”
살짝 가라앉을 뻔하고 플루토는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좀 더 사람들한테 내보일 만한 시를 쓰면 나도 출품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물론이야.”
테슬러가 격려하며 밝게 웃었다. 꿈만 같았다.
며칠 뒤 테슬러와 코일은 플루토와 함께 여객선에 탔다.
코일에겐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다. 테슬러가 클라프로트를 피해 달아나 한동안 살았던 나라지만 코일은 친구의 편지로밖에 거의 접하지 못한 낯선 땅이었다.
여객선이 출항하고 금방은 셋 다 갑판에서 바다 구경하기 바빴다. 그러나 플루토가 멀미를 하는 바람에 금방 선실로 돌아와야 했다.
피로와 멀미로 잠든 플루토를 자기 방에 두고 테슬러와 코일은 그 옆방에 들어갔다.
“잘 먹고 건강해지면 멀미도 덜 하려나?”
바다 구경을 더 하고 싶었던 코일은 아쉬운 얼굴로 플루토가 자는 방 쪽을 바라보았다.
“멀미는 체력하고는 큰 상관없어.”
테슬러가 코일을 다독였다.
“차라리 이렇게 푹 자는 편이 힘들지 않아서 다행일지도 몰라. 우리끼리 뭐 하고 놀지나 생각해보자.”
경호 임무지만 테슬러는 여유가 있었다.
플루토의 객실엔 공작가의 시종도 있고, 침입자가 문을 억지로 열면 엄청난 소리가 나도록 장치도 해놓았다. 청야성 공작의 목숨을 노릴 정치적인 문제는 없는지도 철저히 조사했다.
코일도 금방 수긍하고 객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말 거기는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
예전 편지 주고받을 때 가장 신경쓰였던 것부터 묻자 테슬러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응. 진짜 맛있어. 비싼 코스요리만 그런 게 아니라, 노점에서 파는 싸구려 군것질거리도 이쪽이 훨씬 나아. 이번에 먹어보면 너도 알게 될걸.”
코일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플루토도 이번엔 후원자로 가는 거니까 잘 대접받을 거야. 전시회 주최자인 펠라당 씨도 굵직한 후원자한테 해를 끼칠 이유는 없어보이더라고.”
다른 수상한 면이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코일은 눈빛으로 설명을 재촉했다.
“그 사람 미술평론가로 유명한데 다른 일도 하고 있거든. ‘장미십자회’라는 비밀 단체의 회장이야.”
“장미십자회? 그런 반정부 단체는 못 들어봤어.”
코일이 갸웃거리자 테슬러가 피식 웃었다.
“그야 반정부 단체가 아니니까. 마법이 어쩌고 하는, 할 짓 없는 호사가들의 취미활동일 뿐이야.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 참가하는 예술가들 중에도 회원이 꽤 많아.”
“뭐야, 겨우 그런 거였어?”
코일도 김샌 얼굴로 웃었다.
“다 큰 어른들이 창피하게 그런 거나 믿고 말이야. 플루토한테도 회원 되라고 하면 어쩌지?”
“원칙상 우리가 그런 것까지 막아줄 의무는 없어. 고용주의 취미활동에 간섭하는 거잖아? 펠라당 씨가 대놓고 사기를 친다면 모를까.”
테슬러의 표정이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플루토는 자기 시를 인정받고 싶어하니까,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고 권하면 거절하지 못할 거야. 단순히 취미활동이라고 넘어가줄 수준인지, 사기나 범죄라고 할 만한 일은 없는지 가는 김에 살펴봐야겠다.”
거사의 적절한 시기를 노리기 위해 정치 관련 정보도 꾸준히 모으고 있는 테슬러였다. 플루토의 입지가 여전히 불안정한 것쯤은 본인에게 듣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후원 상대가 공작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을 만큼 건실한 사람인지 조사하는 것도 의뢰 범위 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칫 상황이 고약하게 흘러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녀석이기도 하고.’
펠라당 씨도 새 청야성 공작이 소문만큼 만만한 애송이가 아님을 일찍 알아두는 편이 모두에게 안전한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