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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리부동表裏不同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속으로 가지는 생각이 다름.
엘리사는 비질 요새에 처음 도착한 날을 떠올렸다. 마치 대재앙이 다시 도래했던 양 어둠의 피조물을 죽여야 했고 그로부터 시작한 모험은 대재앙의 부록 같았다.
그 시점에 그런 경험을 했다면 회색의 감시자가 아니어도 대재앙 2권쯤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다음 권을 예고하고 끝나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인기가 많다고 억지로 억지로 이어 쓴 끔찍한 두 번 째 책. 하지만 그 ‘모험’은 다행히 부록이었고 부록은 다소 짧게 끝났다. 함께했던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 연락도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비질 요새로 돌아왔다. 대재앙이 끝나고 그의 엘프 연인 제브란과 함께 했던 여행 같은 여유는 없었다. 대재앙의 여파가 남아있는 아마란틴은 아직 손 볼 곳이 너무 많았다. 상인이 다니는 길을 정비하고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어둠의 피조물을 정리하고 무너진 집을 수리하고 성벽을 다시 단단히 하고 오염된 땅을 되살리고…. 눈코 뜰 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영주자라는 휴식이랄 게 없었다. 그나마 쉬는 날이라면 제브란이 아마란틴에 방문할 때였다. 그의 까마귀는 언제나 예고 없이 나타났다. 제대로 된 출입문을 이용하는 때도 적었다.
“그러니까, 강도한테 당했다고?”
그러니 한밤중 정문으로 들어온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안티바의- 까마귀가?”
엘리사는 놀라움인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두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강도 네다섯쯤이야 일도 아닐 텐데. 그 강도가 전부 거인이기라도 했나?
제브란은 엘리사의 방 한쪽 의자에 앉아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를 그대로 맞았는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창백해 보였다. 심지어 왼쪽 눈두덩이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편지했던 선물은커녕 비상용 무기조차 없는 제브란은 정말이지 처량해 보였다. 꼭 처음 만났던 그날 같았다.
“아주 실력이 좋았어. 허를 찌를 줄 아는 놈들이었지.”
제브란은 추운지 몸을 더 웅크렸다. 카펫 위로 물이 뚝뚝 흘렀다. 엘리사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이마가 차가웠다. 제브란 그대로 떨어지는 손을 잡았다. 손도 그만큼 차가웠다.
“어딜 통해서 온 거야?”
“남동쪽의 산길. 거기가 지름길이니까.”
제브란의 말에 엘리사가 한숨 쉬었다. 한 달 전부터 강도니, 도적단이니, 몇 번 보고를 받았던 곳이었다. 신출귀몰하게 혼자 다니는 여행객이나 상인을 입고 있는 옷만 남기고 전부 털어버린다고.
“용케 귀걸이는 그대로네.”
엘리사는 그의 오른쪽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이 귀걸이를 가져가면 아마란틴에 사는 늑대 같은 주인님이 절 잡아먹을 거예요.’ 하고 빌었어.”
제브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엘리사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때 기다리던 인기척이 들렸다. 엘리사는 하인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을 보았다.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빼꼼 문이 열렸다. 안을 확인 한 하인이 엘리사와 눈을 마주치자 휙 피했다. 며칠 전 고용한 붉은 머리 엘프였다. 제브란의 시선이 쭈볏거리는 하인에게 향했다.
“여, 영주님. 욕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이라고 신입을 깨워 시킨 게 틀림없었다.
“곧 갈게.”
“엘프 하인이 있었나?”
제브란이 가림막 뒤에서 옷을 벗으며 물었다. 엘리사는 욕조 물 온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입욕제가 들어간 물은 향긋한 향이 났다. 욕실에는 갈아입을 옷부터 수건까지 전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며칠 전 들어왔어.”
“비질 요새에는 격리촌이 없잖아.”
제브란은 옷을 벗고 모포를 뒤집어쓴 채 욕조로 향했다. 그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욕조 옆에서 망설이는 듯하다 모포를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엘리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엘리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제브란은 온몸 여기저기 난 멍과 생채기를 보았다.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인 줄은 나도 몰랐는데.”
제브란이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엘리사의 표정은 태평하지 않았다.
“안 되겠어. 날이 밝자마자 치유사를 불러와야지.”
“이 정도 가지고?”
이 정도라니?
물론, 대재앙 때를 생각하면 ‘이정도’가 맞았지만 지금은 대재앙이 아니었다. 여전히 까마귀단 수장으로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는 제브란에게는 아직도 ‘이 정도’겠지만 엘리사에겐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황이 여의찮은 것도 아닌데 내버려 둘 필요가 없었다. 엘리사는 욕조 옆에 앉았다. 촛불에 멍든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몸이 녹는지 제브란은 그대로 욕조에 몸을 푹 담그며 눈을 감고 기댔다.
“물이 다 식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지금?”
“그래. 지금. 아니면 잠도 못 잘 지경이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데.”
제브란이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엘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사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좋아. 좋아. 영주님. 분부대로 합죠.” 결국 제브란이 눈을 뜨고 욕조에 기댔던 몸을 바로 일으키며 말했다.
“남동쪽 산길 입구까지는 운 좋게 짐마차에 타고 갈 수 있었어. 항상 사용하던 길이라 그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아마란틴으로 간다고 했는데.” 제브란은 제 일이 아닌 양 무용담을 늘어놓듯 말을 시작했다.
“뭐, 어쩔 수 없이 나와 헤어졌지. 어차피 하루 정도 걸으면 도착하니까. 그러고 점심쯤인가 산길을 걷는데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계속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어디인가 싶어서 주변을 살펴보니 비탈길 중간쯤에 어린애가 앉아서 울고 있는 거야. 귀를 보니 엘프더라고. 그냥 지나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었어. 이래 봬도 퍼렐던의 영웅과 함께했던 몸인데 말이야.”
제브란은 말을 늘어놓았다. 엘리사는 대충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상상되었다.
“그래서-.”
“아니, 아니 더 들어와. 곧 제일 재밌는 부분이라고.”
엘리사가 입을 열자 제브란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 ‘그럼 그렇지, 미끼구나. 어떻게 저런 어린애를 미끼로 쓰나.’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다를 걸고- 물론 그 정도로 날 넘어트릴 수는 없었어. 등을 미는 거야. 여기서 넘어졌지. 아니 말 그대로 산비탈을 구르다가 나무에 걸려 멈췄어.”
엘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브란 얼굴 위 거슬리는 멍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닿자 그가 움찔했다.
“누가 날 공격했나 싶어서 검을 빼 드는데… 애들이더라고.”
“애들?”
“대장으로 보이는 애가 16살 정도로 보였고 울고 있던 그 엘프 어린애는 많아야 일곱? 여덟?”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에 십 대로 이루어진 도적단이라니. 아니 강도단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비질 요새로 오는 길목에.
“총 다섯 명. 나이는 다양했고. 그쪽 계획대로라면 내가 기절해야 했는지 바로 일어나니 놀라더라.”
“그런데 왜 짐을 전부 빼앗겨? 그냥 도망칠 수 있잖아.”
“전부 내줬어. 검을 겨누는데 어떡해. 애들을 죽일 수도 없고 말야.”
제브란은 역시나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엘리사의 표정은 좋아질 줄 몰랐다. 그를 놀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면 엘리사의 책임이기도 했다.
“아- 그래서 자기 선물도 빼앗겼지만-. 다음에 올 때 더 좋은 걸로 줄게.”
제브란이 욕조 턱을 잡은 엘리사의 손을 겹쳐 잡았다. 손이 미지근했다. 제브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엄지로 손등을 문질렀다.
“사람을 보내긴 해야겠어.”
엘리사는 한숨을 푹 쉬곤 말했다.
“영주님께서 꼬마애들을 데려다가 감옥에 넣을 거로 생각했다면 말하지 않았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 나이에 그런 도적질을 하고 있으면 안 돼. 부모가 없어도 말이야. 그러다 잘 못 하면 죽을 거야. …그것도 아니면 노예로 팔려 가던지.”
덧붙이는 말은 조심스러웠다. 엘리사는 제브란을 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촛불이 일렁인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해진 욕실에 높이 난 창 밖으로 작은 빗소리만 울렸다. 엘리사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회색의 감시자 사령관도, 퍼렐던의 영웅도 아닌 비질 요새의 주인 아마란틴의 영주 엘리사 쿠슬랜드에게 제브란이 겪은 일은 예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요새 근처는 이곳저곳에서 ‘퍼렐던의 영웅’이라는 명성만 듣고 난민들이 몰려왔고 그것도 모자라 데너림의 엘프 격리촌에서 있었던 일이 어떻게 퍼진 건지 격리촌에서 나왔거나 누군가에게 도망친 엘프들까지 합세했다. 며칠 전 고용한 엘프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다수가 성벽 밖에서 빈민촌을 만들며 생활했다. 일부는 성안에서 일을 찾았지만, 불법적인 일을 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고 엘리사는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씻고 나와.”
엘리사가 말했다. 제브란은 심상치 않은 엘리사의 얼굴을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심각한 일이야?”
아직 덜 마른 머리 때문에 어깨며 깨 벗은 가슴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브란은 연고를 들고 자기 얼굴을 빤히 보는 엘리사에게 물었다.
“영주의 일이지.” 목덜미에 꽤 크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엘리사는 상처 위에 약을 발랐다. 제브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상처가 더 많았다. 머리는 잘못 부딪혔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엘리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뚝에 난 상처 위로 연고를 발랐다. 자기가 한다던 제브란은 엘리사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해서 엘리사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요새 밖에 사람이 늘어난 것 같았어.”
“맞아.”
엘리사는 제브란의 손을 살폈다. 손 등에 작은 생채기가 있었다. 아까 일어날 때 보니 허벅지에도 상처가 난 것 같았는데. 엘리사의 시선이 내려가자 제브란이 웃었다.
“다른 곳은 괜찮아?”
“걱정하는 곳이 어딘데?”
제브란이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엘리사는 모르는 체했다.
“고집부리면서 참지 말고. 역시 내일 치유사를 부르는 게 좋겠어. 멍도 없애고.”
“영광의 상처인데?”
제브란이 그의 손을 당겼다. 엘리사는 모르는 척 당기는 대로 따라가 제브란의 무릎 위에 앉았다. 입술이 마주쳤다.
“선물로 네가 좋아하는 걸 샀었는데.” 제브란이 조용히 말했다.
“뭘?”
“네가 재밌게 읽었다는 책의 다음 권.”
엘리사가 멈칫했다. 실망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제브란은 알아챘다. 하지만 금세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선 아쉽지 않은 체했다.
“주문하면 돼.”
지금은 다시 구할 수 있는 책보단 눈두덩이에 부어오른 멍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저 정도 멍은 따로 약을 바르거나 마법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다 낫기까지 몇 주는 있어야 한다. 계속 그가 비탈길을 굴러떨어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면 과거 언젠가 다른 때, 어둠의 피조물을 만났을 때. 그때는 눈두덩이를 베었었지. 그래서 피가 철철 났었는데, 윈이 상처도 없이 치료했었다.
엘리사는 그의 무릎 위에서 바로 내려왔다. 하지만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브란이 몇 달 전보다도 말랑해진 손을 잡았다. 그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한 달 전쯤 보고가 들어왔었는데….”
그때 제브란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멜로니입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제브란을 위해 욕조 물을 준비했던 하인이었다.
“들어와.”
엘리사가 말하자 스르르 문이 열렸다. 멜로니는 조심스레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다, 다름이 아니라….” 멜로니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멍 빼는데 정말 효과가 좋은 연고가 있어서요. 저희 어머니가 만드는 법을 알려주셔서…. 엘프 뿌리랑 다른 몇 가지 재료를 섞었어요. 얼굴에 멍든 걸 보니 생각나서… 필요하실지 모르겠지만….”
촛불 사이로 붉어진 멜로니의 얼굴이 보였다. 제브란은 조금 놀란 눈이었고 엘리사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
엘리사는 상자를 받았다. 멜로니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황급히 방을 나갔다.
“독 아니야?”
제브란의 말에 엘리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아니, 갑자기 이런 좋은게 나타날리 없잖아.”
“그렇다면 영주님이 독살당하지 않기 위해서 까마귀가 먼저 시험해 보는 건?”
엘리사가 장난스레 말했다. 제브란은 과장한 몸짓으로 상자를 받아 들고 인사했다.
상자 안에는 반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제브란은 냄새를 맡고 심지어는 살짝 찍어 먹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약이야. 진짜 엘프 뿌리가 들어갔고.”
엘리사는 그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