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표리부동表裏不同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속으로 가지는 생각이 다름.
엘리사는 종종 꿈을 꿨다. 그 꿈은 대부분 실패와 얽혀있었다.
가족이 죽었던 날의 꿈. 대재앙을 막지 못하는 꿈. 그리고 제브란이 오면 어김없이 그가 나오는 꿈을 꿨다.
꿈은, 마치 대재앙 때 회색의 감시자가 꾸었던 그 꿈처럼 엘리사의 머리를 오염시켰다. 무언가 그를 부른다 엘리사는 목소리를 듣고 향한다. 제브란이 눈앞에 보인다. 까마귀단이 제브란은 죽였다. 그들은 제브란은 갈기갈기 찢고 보란 듯이 귀걸이를 한 귀를 잘라 엘리사 쿠슬랜드에게 보낸다. 안티바에서 아마란틴으로, 엘리사가 모르는 숲속에서 출발해 비질 요새로 상자 하나가 도착한다. 그 상자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엘리사는 비질 요새에 묶여있다. 그는 회색의 감시자 사령관이자 영주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지위는 곧 그의 임무였고, 또 의무였다. 그는 이제 모험가가 아니다. 엘리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알량한 복수마저. 안티바의 까마귀단을 무너트리는 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꿈에서 엘리사는 그 귀걸이를 잊는다.
“엘리사.”
“제브.”
엘리사는 몸을 돌려 누웠다. 이마가 땀으로 젖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는 존재를 확인하듯 더듬거리며 제브란을 안았다. 제브란은 대재앙의 한 가운데 악몽을 꾸었던 언젠가의 엘리사를 떠올렸다. 엘리사는 그때처럼 제브란을 끌어안았다.
엘리사의 손이 더듬거리며 올라와 그의 귀를 만졌다. 손끝에 귀걸이가 닿았다. 제브란이 그의 손에 뺨을 부볐다.
“으음, 내 사랑 때문에 침대가 너무 더웠나? 땀이 다 났네.”
제브란은 모른 채하고 말했다. 엘리사는 킥킥거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제브란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얼마나 있을 거야?”
“아마, 이 주 정도.”
엘리사는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직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이 주는 짧다. 사실 그가 그간 지냈던 기간을 생각하면 긴 편이지만 여전히 짧게 느껴졌다.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엘리사는 잘 알지 못했다. 아직도 정리 중이라는데, 영주님은 깊게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엘리사는 몇 번 다시 물으려다 제브란 말 대로 많은 걸 알아봤자 득 될 게 없다고 결론 내렸다. 제브란도 엘리사가 자기 일을 자세히 알수록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험이 생활 전부이진 않으니까.
엘리사는 머리를 괸 채 옆으로 누워있는 제브란을 보았다.
“멍이 거의 다 빠졌네. 치유사는 안불러도 되겠어.”
엘리사가 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엘리사가 멍들었던 자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부기도 빠지고 거의 다 사라질 때처럼 노란 자국만 있었다.
“이런 약은 처음 보는데.”
그리고 엘리사는 예고도 없이 이불을 들췄다. 가슴과 허리에 있던 멍도 사라졌다.
“무슨 약인지 몰라도 제조법을 알아내서 써야겠어. 경비병이나 감시자들이 쓰면 좋을 거야.”
엘리사가 그의 가슴과 허리를 더듬 거리며 말했다. 제브란은 그런 엘리사를 보며 가만히 웃었다.
“내 사랑, 그렇게 만지면 곤란한데.”
엘리사는 그의 말에 손을 들었다. 제브란은 먼저 말을 꺼내놓곤 아쉬운 표정이었다. 제브란이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엘리사의 허리를 안았다.
“좀 더 있다 가.”
제브란이 그대로 일어나 등 뒤로 목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엘리사는 불행히도 머릿속으로 처리해야 할 몇 가지 서류를 떠올렸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아직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시간이 있었고, 제브란이 오면 다들 눈치껏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약속한 시각까지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고개를 돌려 입을 맞췄다. 어젯밤의 가벼운 입맞춤과 달리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사는 잠시 서류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그에 화답했다. 시간이 모자랄 텐데. 분명히 못 멈출 텐데. 여기서 몇 시간이고 있을 텐데….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제브란은 그대로 그를 끌어당기며 누웠다. 엘리사의 다리는 반쯤 침대 밖이었다.
“왜?”
엘리사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제브란이 물었다.
“오늘은 바빠.” 엘리사는 미련을 떨치기 위해 슬리퍼도 신지 않고 일어서며 말했다. “또 저녁에나?”
엘리사는 조르는 목소리에 다시 뒤돌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까지 덮은 이불을 걷어 펼쳤지만 침대로 올라가진 않았다.
“언제나 날짜는 말하지 않고 오잖아.”
하지만 암살자가 예고를 하고 오는 법은 없었다. 제브란은 포기했는지 다시 바로 누웠다.
“피곤하면 더 자.”
엘리사는 그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정확히는 밤중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몸을 눈으로 훑으며 몇 달 사이 더 자란 머리를 모아 묶으며 말했다.
‘영주의 인생은 사람 만나기, 편지 읽기, 숫자 읽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을까? 엘리사는 아마란틴 토착 귀족 중 한 명의 편지를 읽으며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편지를 보내는데 글씨를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 볼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제대로 읽히지 않는 문장을 두 번 읽어 이해하고 기어이 마지막까지 편지를 독해했다. 별 내용은 없었다. 안부 인사와 성을 새로 꾸몄다. 한 번 방문 하시면 좋을 텐데 하고 아부하는 내용이었다. 이걸 이렇게 진지하게 읽어야 했다니. 엘리사는 한숨을 쉬며 편지가 쌓인 왼편에 대충 올려두었다.
집무실은 평범했다. 하우 가문 누군가의 초상화가 걸려있던 곳에 엘리사의 초상화가 걸렸다. 엘리사는 초상화를 거는 행위가 떨떠름했지만 울시 부인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영주에겐 권위가 중요하다면서. 그리고 집무실 책상 바로 앞 무려 안티바에서 공수해 온 값비싼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자리는 언제나 책상이었다. 소파는 가끔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면 쓸 일이 없었다.
엘리사는 편지 아래 있는 서류를 보았다. 숫자의 나열을 보니 바로 읽기 힘든 편지를 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게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틀 내내 날씨도 우중충한데 수확량이 영 좋지 못하니 세수가 이렇게 부족하리라 예상하는 서류를 보니 모든 걸 내팽개쳐버리고 싶었다.
“영주님?”
“들어와.”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엘리사를 불렀다. 엘리사는 확인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브란?”
제브란이 다과와 차를 올린 쟁반을 들고 들어와 발로 문을 닫았다. 엘리사는 제브란의 등장이 마냥 기쁘진 않았다. 일을 빨리 해치워야 빨리 이곳을 나갈 수 있고 그래야 엘리사도, 그리고 제브란도 원하는 걸 함께 할 수 있었다. 제브란은 안티바산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무려 울시 부인이 보냈어.”
“하인을 시키면 될 텐데.”
엘리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제브란은 차를 따랐다. 차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에 동시에 차와 딱 어울리는 레몬 파이가 떠올랐다. 쿠키도 좋고.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놓고 가.”
엘리사가 말했다. 제브란은 눈길도 주지 않고 이마를 짚은 채 서류를 보는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간식 시간이야.”
“저녁까지 끝내려면….”
“울시 부인이 내일까지 끝내도 된다고 하던걸?”
“이걸 빨리 끝내야 시간이 날 것 아냐. 내일까지 하고 싶지 않아.”
“네 재정 고문이 더 검토할 것이 생겨서 이번 주 안으로 끝나지 못할 거라고 전해달라 했어.”
하. 엘리사는 기가 찬 표정으로 제브란을 보았다. 더 검토할 거라니? 저 차랑 다과, 그리고 눈앞의 제브란은 어떻게든 엘리사의 신경을 누그러트리려는 방법임이 틀림없었다.
몇 달 내내 밀 수확량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흉년인데 비까지 와서 다 지은 농사가 망하게 생겼다는 편지를 잔뜩 받았다. 다른 지역도 비슷했다. 그런데 비질 요새 근처에 몰린 난민들 때문에 빈민구제에 밀이 필요했다. 빵이라도 나눠주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와 강도질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염병이라도 돌면 문제였다.
데너림에서 마법사까지 불러와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작업까지 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부족한 돈은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세금으로 채우더라도 수확량이 적은 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좋아. 알았어. 알았어.”
엘리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니 잠깐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제브란이 책상 옆으로 나오는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이블 위 생강 쿠키와 홍차가 제빛을 내고 있었다. 엘리사는 소파에 앉으며 쿠키를 베어 물었다.
“울시 부인이 널 보낸 건 다 이유가 있어. 나한테 일종의 경고를 하는 거야. 이게 하루 이틀 내에 끝날 일이 아니니까 각오하라고.”
엘리사는 쿠키하나를 해치운 뒤 홍차를 마시며 말했다. 제브란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엘리사는 두 번째 쿠키를 집었다. 먹기 시작하니 아주 잘 들어갔다. 제브란은 딱 맞추어 홍차를 따랐다. 향이 주변에 퍼졌다.
“이번에는 어딜 통해서 온 거야? 안티바에서 배 타고 오면 바로잖아. 산을 넘을 필요도 없고.”
“올레이에 일이 있어서.”
엘리사는 쿠키를 세 개째 해치우고 찻주전자를 비웠다. 먹고 나니 묘하게 나른해지고 긴장이 풀어졌다. 제브란은 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마시는 것만큼은 가려 마셨다. 일 때문에 생긴 습관인지 아니면 의외로 입맛이 까다로운 건지 지금까지도 잘 몰랐다. 엘리사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브란은 쟁반 위로 찻잔을 올려 정리했다.
“아, 올레이는 어때?”
“항상 시끄럽고 화려하고 정신없고.”
“네가 정신없다고 할 정도야?”
“일반적인 시선에서.”
“그쪽 농사는 괜찮나?”
엘리사가 넋두리하듯 말했다.
“보기에는. 지나가면서 본 게 다지만 아마란틴은 사정이 안 좋아 보이던데.”
“겨울을 버티려면 비축분이 있어야 하는데….”
입 안에 남은 홍차가 너무 떫게 느껴졌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다른 지역에서 사들여도 밀값이 올라 얼마나 들어올지 모른다. 다른 지역도 비슷하다면 팔지 않으려 할지도 몰랐다. 아마란틴에서 대신 내줄만한 건 생선 정도였다. 다행히 어획량은 괜찮았다. 사들여 잘 재워두면 겨울을 날 수 있다. 하지만 주식은 밀이지 생선은 아니다.
공납할 밀이 흉년이면 그것마저 줄여달라 아우성을 칠 텐데 줄이면 겨울이 위험하고 그렇다고-.
“엘리사.”
엘리사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짙어지던 차 제브란이 그를 불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는 마치 엘리사는 고민을 아는 양 말했다. 그의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텐데도 대재앙 때 함께 했던 그날들처럼 묘하게 위안받았다. 엘리사는 제브란의 손을 잡았다.
“빨리 끝내야지. 일해야지.”
엘리사가 혼잣말하자 제브란이 웃었다.
“뭐가 웃겨?”
“영주님이 밤 일을 위해 노력하시는 점이 귀여우시네요.”
엘리사가 제브란의 말에 웃었다.
“빨리 가버려. 방해 돼.”
그리고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봐. 경고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제브란이 일어섰다. 그리고 소파를 훌쩍 뛰어넘곤 손으로 엘리사의 양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꽉 굳어서는 해야 할 일도 못 하시죠. 요즘 훈련은 하는 거야?”
엘리사는 대답 없이 풀어지는 어깨를 느끼며 낮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어깨를 타고 목뒤를 꾹꾹 누르다가 손이 슬며시 내려갔다. 엘리사가 그의 손을 찰싹 치자 다시 어깨 위로 올라갔다.
“훈련은 무슨. 일어날 시간도 없는데.”
“감시자 사령관이 말랑해지면 안 되지.”
“어. 퍼렐던도 구했는데. 근육 좀 사라질 수 있지 안 그래?”
제브란이 어깨를 잡은 채 엘리사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영웅을 응원하는 미인의 키스야.”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엘리사는 뒤로 손을 뻗었다. 제브란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빨리 끝낼게. 일. 그러니까 가. 방해돼.”
엘리사는 결심하듯 말했다.
제브란이 쟁반을 주방에 반납하고 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울시 부인이 있었다. 몇 년 전이랑 똑같이 정정하고 꼿꼿한 태도의 노부인은 언제나 딱딱한 태도로 제브란은 맞이했다. 하지만 독대하는 경우는 적었다. 애초에 그럴만한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울시는 비질 요새의 경영과 재정문제에 조언을 주는 고문 위치였고 제브란은 몇 달에 한 번씩 오는 영주의 비밀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저 좀 보시죠.”
그리고 꽤 고압적인 – 물론 소리를 지르거나 잘난 체하진 않았지만 – 태도로 제브란에게 말했다. 제브란은 그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목적지는 울시가 쓰는 사무실로 엘리사의 집무실과 다르게 그의 품성을 드러내듯 잘 벼려진 검날처럼 깨끗했다.
“영주님과 알고 지낸 지 삼 년쯤 되셨나요?”
“삼 년 하고 팔 개월?”
제브란이 손가락을 접으며 대답했다. 울시는 제브란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책상 뒤 의자에 앉았다.
“영주님의 위치는 아시지요. 회색의 감시자 사령관이면서 아마란틴 전체를 관리하는 영주입니다. 퍼렐던의 영웅이자 아노라 왕의 신하이기도 하고요.”
“다 알고 있는 말을 하려고 이곳까지 온 건 아닐 텐데.”
제브란은 불만스러운 태도로 운을 띄우는 울시를 보며 팔짱을 끼었다. 울시의 눈이 그를 훑었다. 엘리사가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옷이었다. 엘리사와 같은 모양의 오른 귀의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아마란틴의 영주는 안티바의 까마귀단 수장이라는 이 엘프를 끔찍하게 아꼈다.
“안티바와 달리 퍼렐던은 암살자를 보내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울시가 책상 위 손을 마주 잡아 깍지 끼며 말했다. “아라이나이씨가 어떻게 생각하시던 페럴던은 더 평화로운 해결책을 추구합니다.”
“내 일이 문제라는 거라면….”
“그 해결책은 단순히 적이라 생각하는 상대를 밀어내는 방식도 있지만 포섭하기도 합니다.” 울시는 제브란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친구가 되기도 하고 협상을 하기도하고 결혼하기도 하지요.”
제브란은 ‘결혼’이라는 단어에서 입을 다물었다.
“회색의 감시자가 2세를 갖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내부에서만 아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쿠슬랜드 영주님의 옆자리는 열려있지요.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지만 전부 거절하고 계세요.”
제브란이 한숨 쉬었다. 안티바에서는 정적을 죽여버리는 편이 더 편리하다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퍼렐던처럼 결혼으로 동맹을 맺지 않는 건 아니었다. 더 올레이에 가까운 방식이었지만 귀족들이 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사용하는 흔한 일이다. 필요하다면 별 애정없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한다.
“헤어지라는 말이라면 엘리사에게 말하는 편이 빠르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제브란은 슬슬 방을 나가고 싶었다. 엘리사가 비질 요새로 온 이후 피하고 싶던 주제였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퍼렐던 식으로 통보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죠. 하지만 영주님이 그걸 받아들이시지 않을 테고요.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알면 화를 내시겠죠. 어차피 후계를 낳을 수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하실 겁니다. 하지만 결국 계속 결혼하지 않는다면 후계를 낳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질 거고, 그렇다면 아마란틴 영주자리는 더 위태로워집니다. 아직도 몇몇 토착 귀족들은 영주님을 기꺼워합니다. 이런 상황에 그 정도 세력도 없는 영주는 무시당하기 일쑤이고요. 이런 면은 아라이나이씨가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브란은 이미 그런 귀족들을 여럿 죽였다. 그들은 존재만 소거하면 해결되는 아주 간단한 존재였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이미 수를 써둔 다른 귀족이었다. 하지만 몰랐던 후계가 있으면 일이 더 복잡해졌다. 엘리사가 알리스터에게 왕위를 권유했던 것과 비슷했다. 엘리사는 아노라가 왕이 되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
“아시겠지만 영주님은 자신의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회색의 감시자가 되기 전에는 쿠슬랜드 가문의 공녀였으니까요. 귀족이라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엘리사님께 들어오는 혼담을 받아들이라 해주세요. 아마란틴에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해주십시오.”
하. 제브란은 기가 찼다. 이 대화를 전부 엘리사에게 말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울시는 그보단 제브란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엘리사가 어떤 상황인지 이 상태가 계속되면 울시의 말이 현실이 될 리란걸 제브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엘리사는 밀려날 거고 결국엔 아노라의 신임도 사라져 어디론가 쫓겨갈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번듯한 성이 아니라 길거리로.
대재앙이 끝났으니 회색의 감시자라는 명칭도 점점 유명무실해짐이 당연한 순리다. 엘리사가 감시자가 될 즈음이 그랬듯 결국 집단 자체가 와해 될 가능성도 컸다. 게다가 그들의 존재는 대재앙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그들은 중립을 지키는 자들이다. 영주 엘리사 쿠슬랜드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영주 자리를 버리라 할 위인들이었다.
“엘리사는 결혼에 관해서는 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곧 하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결국 후계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그 일은 그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울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그가 오기만을 기다린 듯했다. 울시는 헤어지라 말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제브란은 이를 꽉 깨물었다. 울시 앞에서 왜 내가 그래야 하냐고 화내며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문이 두꺼워도 누군가는 말을 옮기기에 십상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문밖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엘리사 옆이 자신의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알겠다.’고, 그게 엘리사를 위한 길이라면 하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제브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