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오늘 종일 뭐 했어?”
엘리사가 마치 긴 자루 같은 잠옷을 머리부터 입으며 물었다. 제브란은 커튼처럼 발목까지 한 번에 내려오는 리넨으로 된 잠옷 안으로 불빛에 엘리사의 실루엣을 빤히 보았다. 엘리사는 자기 몸을 보는 제브란을 보고 보란 듯이 어깨를 살짝 넘는 붉은 머리칼을 한쪽으로 빗어 넘겼다. 왼쪽 귀의 금색 귀걸이가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영주님을 오매불망 생각하며 오늘 밤에 오실까 오지 않으실까 꽃 점을 쳤지요.”
제브란은 과장한 몸짓으로 꽃잎을 따는 척했다. 그가 누워있는 침대 위로 무형의 꽃잎이 흩어졌다. 엘리사는 침대로 향했다.
“점을 치니 오늘은 아니 오신다고 하였는데 이리 오시니 안드라스테의 축복이지요.”
엘리사가 조심성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러고?”
“경비대원 틈에 슬쩍 껴서 어떻게 다트를 던져야 만점이 나오는지 알려줬지.”
엘리사는 푸흐흐 웃었다. 그는 경비대원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가 정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들어가기 전 잡는 것이 그들의 임무 중 하나였고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요새 안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란 건 모두가 알았으나 자존심 문제였다.
엘리사는 그의 옆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제브란의 손이 스멀스멀 그의 허리께를 잡았다.
“저녁때 온다더니.”
“울시랑 얘기 좀 하느라.”
혼담이라도 온 거야? 제브란은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틀어막았다. 늦은 오후 울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올해 밀이 모자랄 거라는 게 공식화됐지. 지금 상태로 말이야.”
제브란이 그의 목에 입을 맞췄다.
“으음,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어제 제대로 못 잔 데다가 내일 아침부터 미사에 참석해야 해서.”
턱선을 타고 오르던 제브란의 입술이 멈췄다.
“미사?”
제브란이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새로 온 주임 신모가 날 아주 미워해. 영주인데 교회에 안 나온다고. 혹시 창조주를 믿지 않으시냐고 따지고. 내가 마치 악마를 모시는 매지스터가 된 것처럼 말하잖아.”
엘리사가 크게 하품했다.
“성에서도 비축한 밀을 쓰긴 하지만 성가회에서 빈민 구제하는 것도 꽤 크거든. 후원금으로도 모자라는지….”
엘리사가 뚫어져라 제브란을 보았다.
“왜?”
제브란이 물었다. 졸음이 차오르던 엘리사의 표정이 슬며시 바뀌었다.
“같이 갈까?”
“내가?”
제브란이 그의 옆에 앉았다. 엘리사는 그의 다리를 툭툭 쳤다.
“나는 왼쪽에 서고 너는 오른쪽에 서서 나란히 앉으면 다들 귀걸이에 대해 한마디씩 할 거야. ‘그 암살자 애인’이 너라는 걸 다 알겠지.”
대부분 소문이란 건 ‘엘프’라는 명칭이 따라다녔지만 엘리사는 그 부분을 뺐다. 아니, 애초에 이런 얘기를 농담이랍시고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제브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울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대화에도 제브란이 공개적으로 엘리사와 어떤 ‘관계’라는 걸 알린다는 얘기는 선택지에 없었다. 하지만 미사에 참석한다면 ‘소문으로만 듣던 그 엘프’와의 관계가 공식화될 텐데. 엘리사는 윤색해주었지만.
엘리사는 꾸물꾸물 움직여 제브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제브란이 그의 뺨을 쓸었다.
“초대는 고맙지만 ‘암살자’는 얼굴이 알려지면 곤란하잖아.”
제브란은 말을 고르다 대답했다. 엘리사는 안심했다. 더는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영주로 움직여야 할 때는. 종종 그를 여러 명목으로 대동하긴 했지만, 그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항상 귀걸이도 빼놓았었다. 그 귀걸이가 없어도 교회는 말이 달라진다. 엘리사는 울시 이외의 사람이나 그의 손님으로 온 신실한 귀족 이외의 사람과 미사에 참석한 적 없었다.
“할 수 없지. 나 혼자 그 지루한 미사에 참석해야겠네.”
엘리사는 두 번 묻지 않았다. 두 번째 물었다면 제브란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을지도 모른다. 엘리사의 고집 때문에.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브란은 그 사실에 실망했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른 새벽 드디어 비가 그치고 안개로 둘러싸인 요새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엘리사는 전혀 신성하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제브란을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엘리사가 움직이자마자 일어났다. 그러면서 안드라스테의 축복을 받고 오라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엘리사는 전날 밤의 대화를 떠올라 양심이 쿡쿡 찔렸다.
엘리사는 그의 방문 덕에 길어지는 미사에 하품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미사를 버텼다. 주임 신모와 인사하고 주임 신모의 내실로 가 빈민 구제에 관해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교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재앙의 여파로 신도들이 늘어나 후원금이 늘었지만 동시에 빈민도 늘었다. 농부들은 오염된 땅을 버려야 했고 상인들은 무너진 가게를 복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주임 신모는 요새 바로 밖 빈민촌을 걱정하는 눈앞의 냉담자를 도와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들도 예산에 묶여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별다른 수확은 없이 피로만 남았다. 엘리사는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는 사실 정도에 안심하며 요새로 돌아갔다.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겠어요.”
엘리사가 요새의 문을 지나치자마자 말했다. 그를 뒤따른 울시가 발걸음을 맞췄다.
“목록을 추려 놓지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날씨 문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지요.”
“이쪽에서 나가는 후원을 좀 줄이면요?”
“더 줄이면 후원금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낭비하거나 아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엘리사는 머리 아픈 고민을 전부 뒤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 지위를 전부 포기하는 수밖에 없지. 퍼렐던을 한번 구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혼자도 아니다. 퍼거스에게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겠지. 연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대재앙 때 얘기만 해줘도 괜찮을 법 한데. 그러다 조카가 생기면 조카를 대신 봐주고. 그러면 유모가 할 일도 적어지고 얼마나 좋겠어.
그도 아니면 그때처럼 제브란이랑 올레이며 안티바를 돌아다니면 된다. 회색의 감시자는 오래 살지도 못한다던데, 이 모든 게 시간 낭비 아닐까? 인생을 즐겨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멜로니 같은 아이들이 눈에 턱턱 걸렸다. 퍼렐던 영웅이 여기 있다면서 조금의 구원이라도 바라면서 아마란틴까지 온 이들. 엘리사는 그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이럴 때 모리건이 있다면 정신 차리라고 네가 창조주인 줄 아느냐 해줬을 텐데….
엘리사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집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울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엘리사를 보았다.
“영주님?” 울시가 그를 불렀다.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아니야. 일은 끝내야지.”
“아니요. 제가 목록을 추려올 때까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시는 엘리사를 지나쳐 먼저 계단을 올랐다. 성안은 조용했다. 엘리사는 그를 보면 멈추고 일어나 인사하는 하인들을 지나치다 멈추어 섰다. 익숙한 귀가 보였다.
“멜로니?”
“예? 예. 영주님.”
그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멜로니가 다시 허리를 더 굽혀 인사했다. 엘리사는 문득 그가 주었던 연고가 생각났다.
“잠깐 와 볼래?”
엘리사가 바로 움직이자 멜로니는 청소도구를 들고 그를 따라갔다. 그의 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건 밖에 놓고 들어와.”
멜로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문밖에 청소도구를 놓은 뒤 엘리사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제브란은 책장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고르다 엘리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그를 뒤따라오는 멜로니와 눈이 마주쳤다. 멜로니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번에 그?”
“맞아.”
엘리사는 바로 큰 창문 아래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종종 집무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 쓰는 책상이었다. 그는 서랍에서 돈주머니를 하나 꺼내 은화와 동화 몇 개를 불러냈다. 멜로니는 문 앞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듯 움츠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 연고 어머니가 만든 거라고 하셨지?”
“네.”
멜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대답했다. 엘리사는 꺼냈던 돈을 멜로니에게 내밀었다. 멜로니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멜로니는 돈 대신 앞치마만 꽉 잡았다.
“자. 그 연고값이야. 경비대가 사는 값보다 좀 더 쳐줬어. 덕분에 제브란 얼굴이 다시 깨끗해졌거든.”
멜로니가 제브란을 힐끔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제브란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멜로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멜로니는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엘리사가 멜로니의 손에 동전을 쥐여주었다.
“어머니는 뭘 하시니?”
“동생이 아파서 계속 집에 계세요.”
“집은 어디고?”
“성 밖에….”
엘리사는 잠시 고민했다.
“그 연고가 더 필요한데 더 만들어 가져올 수 있겠니? 값은 미리 쳐줄게.”
멜로니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지금 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어. 집에 가면 어머니에게 여쭈어보렴. 편지를 보내도 되고.”
‘편지를 보내도 되고.’라는 대목에 제브란이 멜로니를 보았다. 그런 상황에 있는 아이가 글을 제대로 배웠을 리 만무했다. 멜로니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잔뜩 겁먹은 엘리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나가봐도 돼.”
멜로니는 작게 대답하고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엘리사는 –아직 오전이지만-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울시 부인에게 말하는 건 어때?” 제브란이 뿌듯한 표정의 엘리사에게 말했다. “네가 특별 취급한다고 생각하면 다른 하인들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더 그렇겠지.”
“그렇네. 말해놔야겠어. 괜히 돈이라도 빼앗기면 안 되니까.”
“그런데, 지금은 일할 시간 아냐?”
“아, 그게.”
엘리사는 먼저 미사 때마다 입는 예복을 벗기 시작했다. 긴 마법사 로브같은 옷을 벗자 목 주변에 레이스가 달린 실크 블라우스와 딱 붙는 바지가 드러났다. 엘리사는 상의 단추 몇 개를 풀고 단추로 고정한 레이스를 뜯어 침대 위로 던졌다.
엘리사는 침대 앞 소파에 앉아 긴 부츠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도 답이 없나 봐. 그쪽도 예산 문제가 있을 테니. 그래서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보려고. 울시 부인이 목록을 주면 열심히 편지를 써보기로 했지.”
제브란이 그에게 다가왔다.
“편지?”
“그래. 손목이 아프도록 써야지. ‘다 사람 살리자고 하는 일이니 돈 좀 내시오.’ 하고. 그럼 조금이라도 후원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밀가루를 사고 빵을 만들고.”
그는 익숙하게 양쪽 부츠 끈을 풀고 발만을 이용해 부츠를 벗었다. 그렇게 행동해도 아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었다.
“직접 초대하는 건 어때? 얼굴 보고 말해야 거절을 덜 하잖아.”
제브란이 영 피곤해 보이는 엘리사의 머리를 자신에게 기대게 하며 말했다. 엘리사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기댔다.
“나쁘진 않은데. 밀이 부족한 거지 돈은 있으니까. 최근 들어는 영 교류도 없었고. 초대장이 와도 가지도 못했거든.”
“요즘 올레이에서 ‘대재앙 피해 구제를 위한 후원 파티’가 유행이거든.”
제브란이 웃으며 말했다. 엘리사는 그대로 가만히 기대고 있다 퍼뜩 일어났다. 제브란은 뒤로 밀려났다.
“이럴 게 아니라.” 엘리사는 위로 상의를 벗어 던졌다. 잘 정리되어있던 머리가 헝클어졌다. “하자.”
엘리사는 푸른색 실크 가운차림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집무실로 가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아직도 방에 있었다. 이곳에서 옷을 제대로 입은 건 울시 밖에 없었다.
“그럼, 여기에 몇 명을 더 추가할 필요는 있습니다. 와이즈너와 딕슨 백작은 필수로 더해야 하고요,”
“딕슨 백작은 질색인데. 대체 대재앙 때 어둠의 피조물 하나 죽인 걸 몇 번을 떠드는지.”
“술이 들어가면 제일 후한 후원자가 될 겁니다.”
엘리사의 괜한 투정을 울시가 정리했다. 제브란은 엘리사 옆에서 그의 업무와 상관없는 과일에 차를 곁들이고 있었다.
“언제쯤이 좋을까?”
“삼 주는 주셔야 준비가 됩니다.”
엘리사는 슬쩍 제브란을 보았다.
“일주일은? 안 되겠지? 가까운 귀족들만 불러서?”
“편지가 다 도착하는 게 일주일 일급이다. 원래는 두 달 정도 기간을 두는 게 제일 좋지만 빠를수록 좋으니….”
연회라 하니 제브란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대재앙 때 엘리사를 도왔던 동료들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겸사겸사 렐리아나나 알리스터를 초대할 수 있으면 더 돈이 들어올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바빴고 특히 렐리아나는 최근 들어서는 연락이 잘 안되었다. 알리스터는 회색의 감시자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여전히 바빠 보였고.
“뭐. 어쩔 수 없지.”
“저녁은 이쪽으로 들이라 할까요?”
정리하는 분위기에 울시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아, 맞아.” 엘리사가 운을 띄웠다. “멜로니 말이야. 새로 들어온 엘프 여자애.”
울시가 서류를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엘리사를 보았다.
“그 애가 준 연고가 아주 좋더라고. 그래서 그 대가로 돈을 좀 줬어.”
“하인에게 돈을 주셨다고요?”
뾰족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울시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연고는 멜로니의 어머니가 만들었다고 하고, 난 그걸 사고 싶거든.”
엘리사는 울시의 반응을 무시하고 말했다. 좋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분 나쁜 일로 덮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시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예의를 지키고 상하관계가 확실한 사람이니 엘리사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절 통해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나요?”
“그 말을 전하려면 집에 가야 하잖아. 아니면 편지를 보내던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다른 하인들과 차별대우하지 않는 것처럼, 잘.”
엘리사는 몹시 어려운 부탁을 했다. 막 적응해야 하는 시기에 집에 보내라니. 하지만 울시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브란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어떻든 골라놓은 책을 펼쳤다.
“알겠습니다. 처리하죠.”
울시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기지개를 쭉 켰다. 저녁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예전에는 울시 부인이 예전 가정교사 같다고 무섭다며.”
“지위로 해결하기로 했어.”
제브란의 말에 엘리사가 말했다. 엘리사는 포크로 과일을 푹 찍어 먹었다. 귀족이라 좋은 건 여럿 있었는데 공녀가 아니라 영주님이라 좋은 건 더 많았다. 엘리사는 자신의 지위가 좋았고 권위도 좋았다. 이렇게 누워서 누군가 저녁을 대령해주는 것도 좋고 예쁜 엘프 애인을 끼고 깨끗한 소파에 앉아서 유유자적하는 것도 좋았다.
물론 머리 아픈 업무만 빼고. 훈련할 시간도 없어서 근육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지만. 엘리사는 책을 읽는 제브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저번에 읽었다며?”
“기억이 안 나서.”
엘리사가 과일을 찍은 포크를 제브란의 입 앞에 내밀자 제브란이 베어 먹었다. 엘리사는 진지하게 책을 읽는 제브란을 보았다. 그도, 그리고 엘리사도 영 책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대재앙 이후 관심이 생겼다. 정확히는 대재앙 이후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대재앙을 무대로 한 소설에 관심이 생겼다. 많은 주인공이 엘리사에 영감을 받았고 많은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여기 주인공인 ‘엘리자’가 너랑 제일 비슷해. 널 알고 있는 사람이 쓴 것 같다니까. 머리색도 같고 성격도 비슷해. 저번에 네가 말했잖아. 의심가는 사람이 몇 있다고.”
제브란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거기서 ‘나’는 다른 회색 감시자 결혼하고 애를 셋이나 낳잖아.”
결혼 이야기에 제브란이 엘리사를 보았다.
“난 잘생긴 엘프 허벅지에 누워 과일을 먹고 있는데. 게다가 난 백작 부인이 아니라 영주님이라고.”
엘리사는 불만을 가장해 포크를 휘둘렀다. 제브란은 미소 지으며 책을 닫았다.
“난 이게 더 좋아. 쿠슬랜드 가문이야 퍼거스가 이어줄 거고-.” 제브란은 혼담 얘기를 꺼낼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엘리사가 먼저 말하기 전까진 입을 닫고 싶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음….”
엘리사가 의문 담긴 눈으로 제브란을 보았다.
“혹시 생각해 본 적 있어?”
“뭘?”
“아니, 아니야. 아니야.”
엘리사는 제대로 말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제브란은 턱을 부딪칠 뻔한 걸 재빨리 피했다.
결혼이라던가, 아이라던가. 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특히 긍정적인 답변이라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결혼하자고 하면? 엘리사는 그 질문이 제일 무서웠다.
애초에 이런 화제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와 있으면 긴장이 풀어져서 할 필요 없는 말을 계속하게 된다.
“생각해 본 적은 있지.”
아니라고 했는데도 제브란이 대답했다. 예의 그가 짓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도 없었다. 다른 대면 모른 채 넘어갈 텐데 지금은 이상했다. 바로 자리가 불편해졌다.
“넌?”
불분명하게, 요리조리 피해 가듯이 말로 하면 현실이 될 것처럼 주어든 목적어든 붙이지 않는 대화는 한심했다. 엘리사는 대답 대신 체리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엘리사가 커가면서 보아온 게 전부 그거였으니까. 지금 영주인 그에게 아들이나, 종종 딸을 말 그대로 바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편지도 있었다. 울시는 몇몇 혼담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일언반구 없이 전부 거절했다. 물론 거절할 때는 굉장히 정중한 어조로 그럴 상황이 아니고 대재앙 이후 복구하는 게 더 급하다며 거절했지만 이젠 그 이유도 슬슬 먹히지 않고 있었다.
엘리사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기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이 또한 커가면서 봐온 탓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여성이니 애를 가지면 어찌 되었건 영주의 자식이 되었다. 누구의 씨인지 의심할 필요도 없어 편리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한다는 그런 환상에 빠져있진 않았지만 지금 엘리사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오늘 저녁은 양고기라던데. 아까 들었어.”
제브란이 대답 없는 엘리사에게 말하며 엘리사의 곤란함을 대신 해결해주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다른 머리 아픈 일은 지금 차례가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