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Text:
“지난번에 색출 명령하신 ‘강도단’ 일부를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남은 자들도 흔적을 찾아서 곧 요새로 데려올 예정입니다.”
비질 요새의 청지기 그레이블이 말했다. 그는 보고 내용을 적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 옆에 울시는 조용히 필요한 내용을 적기 위해 종이를 고정한 판과 깃펜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바사리 가문에서 기부한 밀은 재정 담당이 비축분과 쓸 수 있는 양을 나누어 관리할 예정이고 곧 보고 올릴 예정입니다.”
그레이블은 내용을 다시 살폈다.
“연회 때 쓸 장식품들은 명령하신 대로 창고에서 꺼내 닦고 있고 커튼과 테이블, 잔도 전부 꺼내 닦고 있습니다. 또… 경비대장이 이번에 들어온 연고의 효과가 정말 좋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더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아, 그거.”
멜로니는 엘리사의 부탁대로 몇 통의 연고를 들고 왔다. 울시가 확인 후 값을 치른 게 며칠 전이었다.
“정식으로 거래하려면 상인 조합을 통해야 해. 일정한 양을 보급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효능은 나도 알고 있지만….”
엘리사는 울시를 보았다. 첫 거래는 엘리사 개인의 거래로 기록했고 양이 적어 상인 조합이 항의하진 않을 테지만 두 번째부터는 문제가 된다.
“네. 맞습니다. 상인 조합을 통해야 합니다.”
“가능한가?”
“…원칙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조합 내에서 제품을 검토하고 통과한 뒤 조합비를 내면 할 수 있습니다.”
“드워프도 몇 있는 걸 생각하면 엘프여도 상관이 없을 테고. 이전에 쓰던 것 보다 훨씬 좋아서 도움이 될 텐데.”
엘리사는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알아봐 주겠어? 추천이 필요하면 내가 추천장을 쓰지.”
울시는 잠시 멈칫했지만 종이 위에 엘리사의 말을 적기 시작했다.
“다음은?”
“성안 비 새는 곳 수리가 끝났습니다. 수리비 지출 명세는 보고 전 드린 서류에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다른 보고사항은 없습니다.”
울시가 말했다. 엘리사는 울시가 주었던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건 바로 확인할게. 그럼 나가봐도 좋아.”
엘리사가 말하자 그레이블은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하지만 울시는 그레이브가 나가길 기다렸다.
“재단사를 부르셨다고요.”
“연회 때 입을 옷을 맞추려고. 제브란도 마찬가지고.”
엘리사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울시를 보았다.
“아라이나이씨는 연회 전에 떠나시지 않나요?”
“아, 그때까지 있기로 했어.”
엘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울시는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하려고 남은 거야?”
“아, 그건 아닙니다. 상인 조합 건에 관해 더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다른 엘프라면 모르겠지만 멜로니의 어머니 같은 경우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주님이 추천해주신다면요.”
엘리사는 울시의 말에 한숨을 쉬며 의자에 기댔다.
“데일스 엘프 출신이잖아. 자기 부족이 어딘지도 알 거고, 부모도 알 거야.”
“상인 조합은 과거의 행적이 불확실한 자를 꺼립니다. 또… 성 밖에 사는 난민들을 꺼리고요.”
“가게가 없어서? 어디 명부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격리촌에 살았다면 차라리 쉬웠을 겁니다. 신원이 훨씬 확실하니까요. 격리촌 내 엘프는 그 지역 영주가 명단을 관리합니다.”
엘리사는 턱을 문질렀다. 알링을 중심으로 한 아마란틴 상인 조합은 이미 회원 수가 많아 까다로웠다. 하지만 신분이나 역할만 확실하다면 종족을 가리지 않고 행상인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추천서를 쓸 정도인데 그 정도면 보증이 확실하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특별 취급하는 걸로 보일까 봐? 멜로니 때문에 상인 조합에 추천해 준 거로?”
“네.”
엘리사는 잠시 울시를 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거래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런 이유로 그런 물건을 놓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리고 멜로니의 어머니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누구든 두 번째 기회는 있어야 했다. 엘리사는 그런 이들을 많이 만났다. 또 그런 기회로 변화한 상대가 그의 옆에 있었다. 무엇보다 빈민촌을 벗어날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그런 물건은 흔치 않아. 그리고 그 정도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해.”
“그럼 진행할까요?”
“그래.”
엘리사는 오전 업무가 끝난 뒤 재단사를 만나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했을 때 재단사는 이미 도착한 뒤였고 제브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사이의 탁자 위에는 벌써 꺼내놓은 천 견본과 옷에 넣을 문양과 디자인을 망라한 책이 펼쳐져 있었다.
재단사 로이자는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섰다. 몸에 꼭 맞는, 하지만 고풍스러운 옷에 머리는 바짝 넘겨 묶어 깔끔한 인상을 풍겼다. 로이자는 대재앙 전부터 알링에서 일했던 재단사로 하우 가문과도 몇 번 거래 해 알게 되었다. 그 덕에 알링으로 와 새로 산 옷은 대부분 그의 솜씨였다. 지금 제브란이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로.
“영주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이자가 일어서 깍듯이 인사했다. 제브란은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이 옷도 로이자 솜씨라며?”
제브란이 자수가 놓인 소매 들어 보이며 말했다.
“주인이 누군가 싶었더니 퍼렐던의 용사 중 한 명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용사?”
“네. 전 대재앙 때 영주님과 함께한 일행분들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용사라고 부릅니다.”
엘리사가 싱긋 웃었다. 제브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로이자를 보았다.
“그렇게 아부할 필요는 없어.”
“오늘은 연회 때 입을 옷이 필요하시다고요?”
“나는 됐고. 제브란이 입을 옷이야. 2주 뒤쯤인데, 시간이 될까?”
“언제 필요하시든 맞춰 드립니다. 특히 부군이 되실 분이라면….”
로이자는 바닥에 펼쳐진 가방에서 긴 줄자를 꺼내 들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사의 눈은 동그래졌고 제브란은 엘리사를 보았다.
“부군?”
“네. 그 귀걸이가….”
로이자의 뒤에서 제브란이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엘리사는 웃기 시작했다.
“아니야.”
엘리사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곧 결혼하신다는 얘기가….”
“뭐?”
엘리사와 제브란이 동시에 말했다. 로이자는 제브란과 엘리사를 번갈아보았다.
“제, 제가 실수했습니다. 전부 다 그 얘기뿐이라.”
“아니. 괜찮아. 말해봐. 대체 성 밖에서 무슨 소문이 도는 거야?”
로이자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바른 자세로 서더니 다시 한번 둘을 번갈아보았다. 어느새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 그게. 어디서 시작된 소문인지 몰라도 곧 결혼식이 있을 거라고 재단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누가 만들지 내기… 아니 얘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마리에타 짓이군. 엘리사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로이자는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문일 뿐이야. 그리고 만약에 내 결혼식에 필요한 예복을 맞추면 당연히 널 부를 거고.”
“영, 영광입니다. 영주님. 실례했습니다.”
“괜찮아. 그런데, 치수를 다시 재야 하나?”
“오늘 입으신 걸 보니 길이가 조금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다시 재는 편이 좋습니다. 실측한 지 반년이 넘어서 치수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고요.”
로이자는 손에 쥐었던 줄 자의 끝을 잡으며 말했다. 엘리사가 제브란을 보자 제브란은 일어섰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리고 귀찮은 투로 말하면서도 상의 더블릿을 벗었다. 귀족 나리들은 보이는 걸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다니까. 하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엘리사가 준비하는 옷이 싫진 않았다. 언제 그런 옷을 입어보나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입고 난 뒤 뿌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눈빛이 좋았기 때문이다.
“바지도?”
“바지는 괜찮습니다.”
제브란이 받침 위로 올라가자 로이자가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로이자의 시선이 드문드문 제브란의 귀걸이로 향했다. 제브란은 애써 그런 시선을 모르는 체했다. 하지만 왜 영주와 그 ‘친구’가 위, 아래 구분 없이 대화를 나누고 같은 귀걸이를 쌍으로 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임이 틀림없었다. 제브란은 왜 금귀걸이 한 쌍을 나누어 가졌는지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엘리사가 펄쩍 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연회 때면 다들 알게 될 텐데?
엘리사는 치수 재는 것을 구경하다 로이자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그가 가져온 천 견본을 살펴보았다. 그중 진한 녹색 천에서 멈췄다. 그리고 천을 들고 제브란을 향해 손을 뻗어 제브란의 머리 아래로 내려 어울리는지 확인 했다..
“흠.”
“아, 지난번에 구매하셨던 그 옷의 원단과 같습니다.”
“그걸 입을 생각이거든. 넌 어때?”
엘리사가 제브란에게 물었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안 보이는데.”
“영주님이 몸소 가져다 달라?”
엘리사가 씨익 웃으며 그에게 향했다. 엘리사는 제브란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천을 올려두었다.
“괜찮은데? 잘 어울려.”
엘리사가 말했다. 로이자는 둘을 힐끗 보았다. 엘리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라면 저렇게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 꼭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 같은 눈빛을 나누진 않겠지.
“너와도 잘 어울리고.”
제브란이 어깨 뒤 천을 잡으며 말했다. 손이 스쳤다. 로이자는 질문이 목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엘리사, 그냥 말하는 게 낫지 않아?”
제브란이 속삭였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로이자에게는 다 들리는 거리였고 제브란도 그걸 알았다. 엘리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재단사가 귀걸이 때문에 우리 관계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거든.”
제브란의 말이 끝나자 로이자는 놀라며 자를 떨어트렸다.
“아, 아니. 아닙니다!”
로이자가 항변했다. 엘리사가 미간을 좁히자 제브란이 웃기 시작했다.
“제브. 내 재단사 놀리지 말아.” 엘리사가 양손을 허리 위에 올리며 제브란에게 말했다. “뭐, 정 궁금하다면야. 로이자, 영주의 예쁜 엘프 애인에 관한 소문은 듣지 못한 거야?”
로이자는 황급히 자를 줍고 허리부터 자를 내려 둘의 시선을 피해 다리 길이를 재기 시작했다.
“그건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공작의 딸이었고 퍼렐던의 영웅이다. 일반적인 인식으로 그런 사람들은 엘프와 동등하게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물론 엘프를 정부로 둔 귀족들은 꽤 보았지만, 쿠슬랜드 영주는 혼자였다. 그가 대재앙 후 복구에 집중한다며 온갖 혼담을 거절한 건 알링에서 유명한 사실이었다.
로이자는 다시 목까지 얼굴이 빨개진 채였고 제브란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밖에서는 입 꾹 닫겠습니다. 고객들과의 신뢰는 중요하니까요.”
지레 찔리는 것인지, 로이자는 자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도안을 골라보시겠어요?”
모든일이 순탄했다. 멜로니의 어머니는 엘리사의 추천장을 받고 상인 조합에 가입했다. 그러면서 멜로니는 어머니의 일을 돕기 위해 일을 하인 일을 그만두었다. 좋은 일이다. 거기에 연회 준비도 순탄했다. 주문한 물건들은 실수 없이 도착했다.
하늘은 파랗고 해는 높았다. 기분 좋은 초가을 날씨다. 그리고 그 범인들이 비질 요새에 도착했다. 8살, 9살, 10살, 13살, 14살, 그리고 마지막 ‘두목’으로 16살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나?
강도단의 ‘두목’은 알현실이나 감옥이 아니라 집무실 안 경비대에 붙잡힌 채 엘리사 앞에 서 있었다.
“배신자!”
지쳐 보였던 여자의 얼굴은 엘리사의 옆 제브란을 보자마자 분노가 서렸다.
“조용히 해라. 바로 감옥에 가지 않은 건 다 영주님 덕이니.”
그레이블이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 제브란을 향해 욕하며 더 강하게 붙잡는 경비대원을 떨쳐내려 했다.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넌- 넌, 넌 귀족이 아니잖아! 부자도 아니고! 그런데 어째서?”
여자가 소리쳤다. 어째서라니, 물건을 전부 가져가지 않았었나? 제브란은 팔짱을 끼었다.
“잠깐, 귀족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엘리사는 여자의 외침을 무시한 채 그레이블에게 물었다.
“아델라 와이즈너, 와이즈너 남작가의 넷째 따님이십니다.”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야. 난 와이즈너가 아니야.”
“그럼 뭔데?”
“제나. 난 제나야. 아델라가 아니야. 아델라는 죽었어.”
엘리사의 질문에 아델라는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16살. 귀족이라면 한참 이것저것 배우고 꿈을 키워갈 나이였다. 그의 부모들은 누구에게 가문을 물려줄지 누구와 결혼을 시켜야 하는지 점치고 있을 시기였다. 하지만 아델라, 아니 제나의 검고 짧은 머리는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있었다. 끝이 너덜너덜한, 남의 것이 분명한 더블릿은 더러웠다.
“그래서 이 애가 ‘두목’이라고? 제브란 알아보겠어?”
엘리사가 말했다. 제브란이 제나를 훑었다.
“당연히. 저 빨간색 더블릿. 몇 년 전 안티바에서 유행했었거든.”
“그레이블, 다른 자들은?”
“전부 8살, 10살, 많아야 14살 정도 되는 아이들입니다. 명령하신 대로 하인들을 시켜 씻기고 있습니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리사가 잡아 온 강도단의 신상이 적힌 종이 위를 손끝으로 쳤다.
“넌 일단 귀족이잖아. 내 맘대로 함부로 할 수 없어.”
“원칙대로라면 재판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레이블, 16살이잖아. 가문에 연락해보는 건?”
“그게… 친척은 찾을 수 없었고 아델라- 아니 제나님 뿐입니다..”
“다른 가족은?”
“죽었어. 전부.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서 죽었고, 어머니는 피난을 가다 병을 얻으셨고 다른 형제들은 전염병 때문에 죽었지. 나만 살아남았어. 하지만 우리 가문이 도와줬던 사람들은 전부 날 무시했지. 심지어는 날 팔아먹으려 했고.”
제나의 얼굴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엘리사는 조용히 한숨 쉬었다. 가족이 전부 죽었다. 엘리사는 잠시 가족이 전부 죽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간신히 운이 좋게 빠져나갔던 자신만 살아남았다. 퍼거슨이 떠나있어 다행이었다.
“네 사정은 이해해. 하지만… 너에게 피해 본 사람들은 널 가만두지 않으려 할 거야. 그레이블, 보통 이런 경우에는 어떤 형벌을 받지?”
“보통 몇 년간 형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원칙상 다른 아이들도 함께 처벌받습니다. 나이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알현실이 아니라 이곳으로 부른 거야. 제나. 넌 어떻게 하길 원해?”
엘리사의 질문에 제나는 당황했다.
“먹고 살 수 없으니 강도질을 한 건 알겠어. 그런데 난 널 감옥에 넣고 싶지 않거든. 죽은 사람도 없고. 피해보상이야 내가 처리할 수 있어. 내가 영지를 제대로 못 돌본 탓도 되니까.”
제나가 엘리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지만 몸부림치지 않았다.
“글을 쓰고 읽을 줄 알 테고 검도 쓸 줄 아나?”
제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레이블, 우리 경비대에 쓸 수는 없을까?”
“경비대는 17살부터 신청받습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자를 선발해 받고요. 무엇보다 지금은 인원이 충분한 상태입니다.”
“음…하인 자리가 하나 비긴 했는데.”
“남작의 소생인 걸 알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레이블의 말에 엘리사가 다시 톡톡톡 책상 위를 손끝으로 쳤다. 제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엘리사는 자신의 16살을 떠올렸다. 생일 선물로 받은 말을 타고 멀리 떠났다가 비를 홀딱 맞고 들어오는 바람에 잔뜩 앓았고, 저택 안에서 장난치다 팔이 부러지기도 했었다. 그의 어려움이란 건 딱 그 정도였다. 대재앙도 없었고 전염병도 없었다. 그의 삶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귀족 출신 임을 알고 하인으로 들이기에는 마음이 걸렸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경비대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경비대원도 대부분 귀족이 아니었지만 둘은 형편이 달랐다. 나이가 어리니 죽을 수도 있는 회색의 감시자 의식을 치르게 할 수도 없다.
그때 제브란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까마귀 단에서 데려갈 수 있다고 해봐.”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귓속말로 말했다. 그레이블이 제브란을 보았다.
“좋아. 일단 얘기를 좀 하고 싶어. 그레이블 잠깐 나가줄래? 팔을 풀어주고 너희도 나가봐.”
그레이블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지만, 인사를 하고 함께 온 경비대원과 함께 방을 나갔다. 제나는 손목을 만지며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경비대에 들어갈 나이가 찰 때까지 성에서 일하거나, 아니면 안티바의 까마귀단에 들어가거나.”
“까마귀단?”
“음, 간단하게 말해서 곤란한 자들을 도와주는 일이지. 검이랑, 독이랑 약간의 육체적 접근으로.”
“암살자 집단이야.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지.”
에둘러 말하는 제브란에 엘리사가 직설적으로 설명했다. 제나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16살짜리 애였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생 대부분을 호화로운 저택이나 성에서 지냈을 아이. 살짝 겁만 주면 엘리사의 말을 따를 게 분명했다.
“넌 어린 편이지만 우리 쪽 일을 도와 줄 수 있어. 현장에 나가는 건 몇 년 뒤가 될 거야.”
제브란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느껴졌다.
“영, 영주가 이런 걸 제안해도 되는 거야? 암살자 집단에 들어가라고?”
제나가 소리쳤다. 당황한 목소리였다.
“아니면 감옥에 가도 좋아. 네가 결정해.”
엘리사가 말했다. 놀리는 투는 아니었다. 제나는 습관적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쓸어올렸다. 묶었던 끈 때문에 붉어진 손목이 보였다.
“날 속인 거 보면 넌 잘 해낼 거야.”
제브란이 말했다. 엘리사는 잠자코 결정을 기다렸다.
“이곳에 있고 싶어. 무슨 일이든 좋으니까. 그런 곳은 가고 싶지 않아.”
“넌 하인들과 함께 지내야 해. 대장 노릇도 못할 거고 남작 취급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네 말대로 와이즈너 이름을 버렸다면 상관없겠지.”
“…상관없어.”
“결정됐네.”
제나가 뒷짐을 진 채 엘리사를 보았다. 신발 구멍 사이로 발가락이 꿈질거렸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걱정하지 마. 보육원으로 갈 거야.”
제나가 책상으로 다가왔다. 제브란은 경계했지만 엘리사는 다가오는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 그 애들은 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벌주지 마세요.” 제나는 긴장한 태도로 말투가 달라졌다. “베사를 격리촌으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애는 격리촌에서 부모를 잃고 도망 나왔어요. 인간들이 빚 대신 그 애를 잡아가려고 해서.”
“베사?”
“제일 어린아이요. 엘프.”
제브란은 산비탈에서 울던 엘프를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 알링에는 격리촌이 없으니까. 알링 밖으로 보내지 않을 거야.”
제나는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엘리사를 보았다. 엘리사는 일어서 제나에게 다가가 제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그 애들은 잘 지낼 거니. 그동안 수고했어.”
그러나 제나는 얼굴을 엘리사에게 기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엘리사는 제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