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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연회가 있는 날이 밝았다. 엘리사는 퍼거스의 자리를 왼쪽에 둘지, 오른쪽에 둘지 아니면 더 멀리 떨어트려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제브란의 자리를 다시 확인했다. 몇 가지 업무를 처리하니 점심시간이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지만 퍼거스와의 대화 때문인지 속이 시끄러워 영 먹고 싶지 않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과일 몇 개로 때웠다.
엘리사는 결혼 날이 되어서야 망설이는 신부처럼 – 이런 비유는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건 없었다. 웃기게도. - 갈팡질팡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고 제브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오늘 초저녁에 있을 일에 들떠 보였다.
어젯밤 다시 방으로 돌아갔을 때 제브란이 자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단지 답답하다는 이유만으로 퍼거스에게 들었던 얘기를 전부 쏟아내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레이블이나 울시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늘의 ‘계획’은 둘 다 몰랐지만, 그러해도. 엘리사는 괜스레 퍼거스가 원망스러웠다. 필요한 정보지만, 원하지는 않았다.
엘리사는 일부러 일을 찾아 헤매다 결국 그레이블에게 붙잡혔다. 연회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영주의 위엄을 위해 치장할 시간이다. 엘리사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손을 내렸다.
“영주님 와이너 가문의 마차를 보셨나요? 뭘 그렇게 치장을 해놨는지 전 왕궁에서 온 줄 알고 놀랐답니다.”
엘리사의 뒤에서 머리를 만지던 하인이 말했다.
“어떤데?”
“흰 바탕에 온갖 문양을 조각해 놓았는데 노란 칠을 해서 언뜻 보면 꼭 금박을 붙인 것 같았어요.”
“노란 칠? 금박 입힐 돈이 모자랐나 보네.”
엘리사가 실없이 농담하자 하인이 웃었다. 그는 한참 엘리사의 붉은 머리를 빗어 내리고 정리했다. 그의 뒤에서는 로이자가 충혈된 눈으로 오늘에야 가져온 옷을 제브란이 입은 채 손보고 있었다. 엘리사도 그와 꼭 어울리는 진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는 드레스가 싫었지만 그레이블도 울시도 반드시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엘리사를 귀찮게 했다. 그 바사리 가문 아들놈 때문이겠지. 엘리사는 목덜미에 닿는 하인의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직 바사리 가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사고가 났을지도 모르지. 마차 바퀴가 빠진다거나, 불쌍한 말의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엘리사는 진창에 빠진 마리에타와 바사리 백작을 상상하곤 웃음을 참았다. 진흙투성이가 된 채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은 꽤 즐거웠다.
“영주님. 끝났습니다.”
모습은 완벽하지만,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로이자가 와 엘리사에게 말했다. 제브란이 로이자의 옆으로 왔다. 그는 영 불편한지 몇 번 팔을 돌렸다.
“원래 이렇게 딱 맞아?”
“원래 불편한 옷이야.”
엘리사가 로이자 대신 말했다. 로이자는 뿌듯한 표정으로 제브란을 보았다. 진한 녹색에 금사로 장식한 옷은 옷 자체만으로 멋졌다. 그리고 그와도 잘 어울렸다. 밝은 금발이 눈에 띄었다. 엘리사는 미소 지었다.
“어머! 멋지세요!”
엘리사의 머리를 땋던 하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로이자, 고마워. 대금은 약속한 대로 지급할 거야.”
“이번에도 주문 감사합니다. 그럼.”
로이자는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제브란은 로브만 걸친 채 앉아있는 엘리사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엘리사가 작게 웃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워?”
“아주. 정말, 매우.”
엘리사의 말해 제브란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먼저 가 봐. 분위기 좀 띄워. 내가 멋지게 등장할 수 있게.”
“영주님께서는 천천히 오시지요.”
“잠깐. 그냥 가려고?”
엘리사가 방을 나가려는 제브란에게 손을 뻗자 제브란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잠시 하인의 손길이 멈추었다. 제브란은 가만히 엘리사를 바라보다 곧 방을 나갔다.
“귀걸이는 빼 드릴까요?”
제브란이 나가자 하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됐어. 괜찮아.” 하인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방 밖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하늘 아래 정원이 보였다. 마리에타와 걸었던 그곳이. 그는 작게 한숨 쉬었다. 하필 시점이 안 좋다. 하지만 결심을 미룰 수는 없다. 이미 그럴 수도 없고.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뒤로 문이 열렸다. 그레이블이었다. 그가 들어오자 하인의 손이 멈췄다. 봉인한 편지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영주님,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혼자 읽어보라는 전갈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레이블이 건네는 봉투를 받았다. 왕궁의 인장이 있었다.
“궁에서 사절이 온 거야?”
“아니요. 주방을 통해서 전달받았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은 일 같았습니다.”
“밀사가?”
“네.”
엘리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레이블은 그의 머리를 만지던 하인에게 손짓해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의아함과 불안을 느끼며 접힌 종이를 폈다. 친필로 쓴 글씨는 아주 우아했다.
친애하는 쿠슬랜드 영주께,
영주님의 헌신과 덕에 비질 요새의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궁 내에서도 영주님에 대한 존경과 찬사가 끊이지 않아, 저 또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왕국 내 엘프 사이에 근거 없는 소문이 돌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더욱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필요를 절감합니다.
최근 일어난 일, 인간이 엘프를 살해하고 엘프가 인간에게 보복하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능한 지도자의 현명한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왕국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엘프들을 위한 관리와 보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영주님의 통찰력과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덧붙여, 영주님과 바사리 가 사이의 연대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알링의 통합을 위한 결속은 분명 왕국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동맹은 개인적인 행복뿐만 아니라, 더 큰 차원의 안녕과 번영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쿠슬랜드 가문에 기쁜 소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축복이며, 왕국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일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우리의 유대가 더욱 강력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영주님, 우리 모두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바로 왕국의 평화와 번영입니다. 영주님의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이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왕실에서
퍼렐던의 왕, 아노라 테이린.
엘리사는 마지막 아노라의 이름을 몇 번 읽었다. 그는 편지를 찢는 대신 이를 꽉 물었다. 의도는 명백했다. 궁에서는 엘리사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성내에서 말을 전하는 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엘리사는 굳이 색출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꺼릴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현지를 쥔 엘리사의 손이 떨렸다.
아노라는 그에게 위협을 느낀다. 엘리사를 아래로 세력이 규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러한 연회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이 문제를 다른 귀족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왕국의 배신자로 통하는 오라비의 요새에서 다른 배신자가 나타나 왕궁을 뒤엎는 것처럼 비참한 결말도 없었다.
아노라의 생각이 어떠하든 엘리사는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떠난다면 도착지는 하이에버이지 래드클리프가 아니다.
엘리사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손의 떨림이 멎지 않는다. 그는 간신히 다시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영주님?”
문밖으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서였다.
“들어와.” 그가 말하자 문이 열리고 그의 머리를 만지던 하인과 그레이블이 들어왔다.
“별것 아니니까 내일 얘기하도록 하지. 먼저 연회에 집중하고.”
엘리사는 그레이블이 입을 열기 전에 말했다.
그레이블이 방을 나가고 엘리사는 무릎 위의 손을 꼭 쥐었다. 머리치장이 끝나고 하인은 장신구를 꺼내왔다.
“다른 드레스가 낫겠어. 파랑색에 금사로 수놓은 드레스, 그걸 가져와.” 하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되돌아왔다. 하인은 옷을 가져오기 위해 방 밖으로 향했다.
엘리사는 홀로 몇 번 귀걸이를 손끝으로 만지다, 이내 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연회는 여러모로 완벽했다. 바사리 가문과의 혼담 소문을 들은 귀족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그를 돕고 싶어 했다. 그들은 빈민을 구제하는 쿠슬랜드 영주에게 온갖 발린 말을 늘어놓았다. 엘리사는 그런 그들과 입이 아프도록 떠들었다. 제브란은 멀리 떨어져 귀족 부인들과 떠들고 있었다. 그는 제브란의 귀에 걸린 금색 귀걸이를 보았다. 엘리사의 귀는 비어있었다.
“데시우스 경.”
엘리사는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아있는 데시우스 바사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다르게 아주 조용했고 수줍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들은 대로 미남자였다. 하지만 엘리사는 전혀 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수줍은 태도가 거슬렸다. 신실한 신자라 하더니, 딱 그런 모습이다.
“영주님.” 데시우스는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춤을 청해야 할까요?” 엘리사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데시우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실례했습니다.”
둘은 손을 잡고 나갔다. 엘리사는 제브란과 눈을 마주쳤지만 피했다. 귀가 스산하게 느껴졌다. 데시우스는 수줍지만 분명 교육받은 태도로 엘리사와 손을 마주 잡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시우스 바사리야. 그 소문이 맞았어.’, ‘그럼 저 엘프는?’, ‘귀족들이 엘프 정부를 두는 게 뭐 그렇게 드문가? 데시우스를 봐, 딱 봐도 샌님이잖아. 제구실이나 제대로 하겠어?’, ‘바사리가에서 마리에타를 택한 이유가 있군.’
데시우스는 잔뜩 긴장해 보였다. 엘리사는 잊었던 발재간을 떠올리며 발을 맞췄다.
“누님이 실례를 끼쳤습니다.”
“어떤 실례를?”
엘리사가 물었다.
“이곳에 온 건 누님의 뜻이었습니다.”
“아, 그럼 데시우스 경께서는 원하지 않으시나요?”
엘리사의 말에 데시우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건 아닙니다. 전 오랫동안 안드라스테의 뜻을 실천하시는 쿠슬랜드 영주님을 경애해 왔습니다. 이 자리만으로도 저에겐 영광입니다.”
데시우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푸른 눈동자는 엘리사를 보고 있었지만 엘리사는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대재앙을 물리친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거겠지. 그는 엘리사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영주로서도, 회색의 감시자로서도.
“제가 싫으시겠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혼담을 족족 거절하셨던 걸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기쁘게 요청을 받아들였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데시우스가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곡이 끝나기 직전 데시우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은 마주 잡았던 손을 놓고 인사했다. 엘리사는 자연히 그와 멀어지면서 제브란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엘리사는 바로 그를 찾고 싶었으나 연회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연회는 끝났다. 귀족들은 각자의 공간으로 향했다. 엘리사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방 문 앞 문고리를 잡고 섰다. 초조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당장 들어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방이 비었어도, 그의 물건이 없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엘리사의 실망했을 테고, 상처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선택을 이해해주길 바랐다. 어쩔 수 없었다고.
엘리사는 방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 바로 보이는 침대에 제브란이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 엘리사의 귀걸이가 있었다. 엘리사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를 끌어안고 사과하고 싶었다.
“설명하게 해줘.”
하지만 엘리사는 그 대신 입을 열었다. 제브란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엘리사가 망설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제브란은 그에게 시선을 거두고 귀걸이를 보았다.
“네 허락 없이 편지를 읽었어. 이해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엘리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해한다니?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뭘?”
“지금으로 만족하는 게 나아.”
엘리사는 귀걸이를 만지는 제브란의 손을 잡았다. 제브란이 그를 보았다.
“아니야.”
엘리사가 말하자 그에게서 긴 한숨이 나왔다.
“울시 부인이 몇 주 전에 나에게 혼담을 거절하지 말라고 설득해 달라고 했어.” 제브란이 그를 보고 말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었고.”
“….”
“뭐라고 하진 마. 나도 알겠다고 했으니까. 말대로 잘 되진 않았지만.”
제브란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엘리사는 그가 들은 말을 다시 곱씹었다.
“딱 바사리 가문 얘기는 아니었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나도 이해해. 네가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제브란이 덧붙였다. 엘리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이건 전부 울시가 꾸민 일일까? 그건 아니다. 아노라가 그런 일 때문에 협박에 가까운 편지를 쓸 리 만무했다. 그냥 일이 이렇게 됐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 화내도 돼. 제브란. 충분히 화날 상황이야.”
엘리사가 말했다. 제브란은 오히려 웃었다.
“명령이야?”
“농담하지 말고.”
“하지만 전혀 화나지 않는걸. 네가 모든 결과를 감내할 필요는 없어. 넌 영주고, 회색의 감시자고, 퍼렐던의 영웅이니까.”
“하지만 넌 날 사랑하잖아.”
엘리사가 절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의미 없이 느껴졌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엘리사도 잘 알았다. 그래서 ‘널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로가 사랑한다 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단지 죄책감을 덜고 싶을 뿐이다.
할 말이 없었다. 대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제브란은 이내 그의 뺨에 손을 올리고 입을 맞췄다. 다른 한 손에는 여전히 귀걸이가 있었다.
엘리사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계획을 미루자고도, 아직은 아닐 뿐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계획은 이것으로 끝이다. 농담으로라도, 이곳을 함께 떠나자고 말하지 않는다. 돌아갈 옛집이 있는데도, 그도 아니라면 전처럼 떠돌며 여행할 수 있는데도. 그것도 아니라면 안티바로 향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엘리사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지위도, 권력도 심지어 사랑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모든 걸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이라 생각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쉽게 포기했다면 지금까지 대재앙이 계속됐을 테다.
“귀걸이 해줄래?”
엘리사가 제브란에게 속삭였다. 제브란은 가만히 그의 귀걸이를 제자리로 되돌렸다.
친애하는 까마귀 대장님께.
네가 언제 이 편지를 받아볼지 모르겠어. 어쨌건 전할 말이 있어서 써.
네가 여길 떠나고 나서 꽤 시끄러웠어. 너 때문은 아니야. 데시우스랑 나의 일 때문이지. 연회 이후로 몇 번 대화가 오갔어. 어디서 지낼지 –당연히 비질 요새 아니야? 그런데도 ‘협의’를 해야 했지.- 날짜까지 잡았거든. 내가 조카가 태어난 뒤에 할 거라고 우겨서 그 이후로 잡았지.
울시나 그레이블은 아주 만족했어. 퍼거스는 진심이냐고 물었는데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지. 심지어 알리스터가 알아서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니까. 상상돼? 그 알리스터가 말이야.
그러고 데시우스랑은 편지를 주고받았어. 안드라스테의 말씀을 꼬박꼬박 인용하더라 좀 웃겼어. 데시우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소식이 없는 거야. 마리에타에게 편지가 왔지. 사고가 생겨서 편지가 안 갔다나.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사람을 사서 찾아봤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데시우스가 성가회에 들어갔어! 뇌물이라도 먹였는지 바로 신임 비서관이 됐지. 그러니까, 성가회 사람이 된 거야. 물론 남자라 정식 사제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서 바사리 가가 난리가 났어. 다시 데려오려 했지만 아무리 마리에타라도 성가회에 들어간 사람을 마음대로 꺼내올 수는 없어서 포기했지. 그걸 나에게 숨기고 있던 거고.
결국 마리에타가 실토하긴 했어. 혼담은 그것으로 끝났고. 난 자유가 되어서 기뻤지만 마리에타 앞에서는 슬픈 표정을 지었지. 너무 힘든 일이었어!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난 웬만한 남자는 못 버티는 정도의 여자가 됐거든. 그걸 이제 알았나?
시끄러운 얘기는 여기까지야.
진짜 할 말은 지금부터고.
그 뒤에 아노라에게 정식 사절이 왔어. 날 안티바로 보내고 싶어 해. 연회에 초대받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날 보내는 것 같아. 안티바 궁에서 날 궁금해한대.
맞아. 내가 드디어 안티바로 간다고.
너라면 먼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딱 편지에 적은 날짜 한 달 뒤야! 네가 만날 장소를 알려줬으면 해.
그럼.
너의 사랑, 엘리사.
참, 격리촌 문제는 고민 중이야. 부지를 어디로 해야 할지 아직도 못 정했어. 최대한 미루려고.
그리고 또, 추신! 알고 보니 제나가 생일 전이라 16살이었어. 곧 17살이 돼! 경비대로 들어갈 거야. 너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부탁받았어.
정말로 끝. 안티바에서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