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ext
“오랜만이지? 지난달 동안에는 좀 바빴거든.”
헤드셋을 끼고 테슬러는 다시 플루토의 정신에 접속을 시도했다.
처음 접속했을 때처럼 간단하면 좋으련만, 지금의 플루토는 정신도 육체도 지나치게 손상이 심했다. 마치 부서지기 직전인 컴퓨터를 작동시키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황제가 되려고 날뛰는 놈들이 많다고 했잖아. 그 중 한 놈이 글쎄, 클라프로트가 살아서 자기랑 있다고 주장하지 뭐야. 제법 그럴싸한 사진까지 신문에 실어서.”
클라프로트를 언급하면 뭔가 반응이 있을까 싶었는데, 계기판에 흐르는 미약한 뇌파는 아주 조금밖에 떨리지 않았다. 정말 그만큼이라도 반응한 건지, 측정 오차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가짜였지. 당연하잖아? 그 귀족 놈이 어디선가 주워온 대역일 뿐이었어. 눈은 콘택트렌즈로 색깔만 맞췄고, 머리는......말도 마. 도망가는데 탈색제 냄새 쫓아가서 잡았다니까. 나까지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 망할 자식이 자폭만 안 했어도 제대로 시체를 확인해서 이런 일을 예방했을 텐데. 그렇지?”
여전히 반응이 없다.
“......”
테슬러는 접속을 중단했다. 무리한 시도가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마저 찢어놓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도저히 평소처럼 대담하게 접근할 수 없었다.
헤드셋을 벗고 유리관 속의 플루토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런 시도 자체가 플루토에게는 성가신 참견인 것 아닐까.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영영 꿈속에 남기를 택해버린 것 아닐까.
“......만약 그때 시신을 제대로 확인했다면, 이번에 혹시 진짜일까 기대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유리관 속 소년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여서,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숨통을 끊고 시신을 높이 매달아서, 모든 게 끝났다고 확신시킬 기대.”
유리관 속에선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니면 너한테 죽는 것도 좋았을 텐데. 안 그래?”
클라프로트에게 복수하는 일은 남한테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다른 반란군이 먼저 황궁으로 쳐들어갔다면 필사적으로 앞지르러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때, 플루토가 자신의 눈앞에서 그의 목을 움켜쥐고 동댕이쳤을 때, 그대로 끼어들 틈도 없이 대리석 벽에 그 두개골을 깨고 목을 부러뜨렸다면.
그때는 플루토의 돌변한 모습에 당황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플루토 역시 클라프로트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잔인한 손아귀에서 고통받았음을.
“직접 죽이지 못해서, 시신을 확인하고 그 죽음을 나와 모두에게 각인시키지 못해서 너도 아쉬울 거라고 생각해.”
대답이 없어도 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본다.
그저 지금은 대답할 수가 없어서 반응을 돌려주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그래도 가짜인 편이 나았던 거겠지. 클라프로트는 분명히 죽은 거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좀 골치아플 뿐이고.”
가짜를 내세운 덕에 그 귀족은 잠깐이나마 재건파들 틈에서 크게 우위를 점했다. 테슬러가 서둘러 무찌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남은 제국군들을 전부 삼켜버렸을지도 모른다.
겁 없는 다른 놈들이 따라하려 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까지 그 의자에 앉고 싶을까, 정말.”
고개를 젓고 테슬러가 사다리에 발을 걸쳤다. 대규모 작전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기 느긋하게 죽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과연 나와 보니 코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잔소리를 예감하고 테슬러가 지레 어깨를 움츠렸다.
“제트 날개 수리가 필요해져서 기다린 거야.”
코일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네가 그 녀석 곁에서 못 떠나는 이유는 이제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찔리는 표정 할 필요 없어.”
“코일......”
테슬러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고글이 뿌옇게 돼서 닦아도 소용 없더라고. 교체할 때가 됐나봐.”
“그래. 보러 가자.”
코일과 나란히 걸으며 테슬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마워, 이해해 줘서.”
“뭘,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이해해 주는데.”
뭔가 더 말하려던 코일이 맞은편에서 오는 패러데이와 세레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안녕, 무슨 일 있어?”
패러데이가 먼저 인사하자 테슬러도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정비할 게 남아서 정비실 가는 거야.”
“그래. 그럼 이따 보자.”
세레스도 뭔가 말하려 했으나 테슬러가 그보다 먼저 움직였다. 코일은 슬쩍 돌아보며 눈인사를 남겼지만 테슬러는 그조차 하지 않았다.
둘을 보내고 나서 패러데이가 중얼거렸다.
“역시 둘 다 평소 느낌이 아니네. 많이 지친 걸까?”
“그럴 만도 하죠.”
세레스의 목소리에도 기운은 없었다.
“그렇게 규모 큰 군단하고 싸워서 섬멸시켰으니, 몸도 마음도 지치는 게 당연합니다.”
“테슬러는 그 전부터 지쳐 보였어.”
패러데이가 눈썹을 찌푸리고 세레스를 돌아보았다.
“댁도 그렇고. 황궁 부수고 황제 죽인 지도 벌써 일 년도 더 지났잖아? 복수도 성공했는데 뭐가 문제인 거야?”
“가족간의 복수라는 게 그렇게 복잡한 문제거든요.”
패러데이는 여전히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 이상 말해줄 수는 없었다.
새 가족을 만들 엄두가 안 난다고 테슬러에게 말했다. 그것은 반쯤만 진심이었다.
열차의 일원으로 적응해 가면서 그 나머지 반의 진심도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테슬러와는 좋은 형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형님이 되어준다면 서로 좋지 않을까.
적어도 이번엔 둘을 싸움 붙이려는 유치하고 잔인한 아버지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일엔 그런 크고 사악하고 분명한 장애물만 있는 게 아닌 법.
병사 한 사람 몫은 금방 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를 감춘 채로나마 대원들과도 쉽게 친해졌다.
그러나 디스티가 달아났을 때 그는 테슬러와 코일이 연구실을 찾는 동안 다른 대원들처럼 열차에서 기다려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절한 테슬러를 코일이 업고 돌아왔다.
코일은 테슬러를 그의 방에 눕힌 뒤 혼자 간호하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있었던 일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혼자 계속 간호하다 지치면 교대해주겠다고 슬쩍 제안할 생각이었는데 그러기 전에 테슬러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총통의 업무에 복귀했다. 휴식을 권할 기회도 없었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테슬러는 그를 패러데이만큼도 신뢰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패러데이는 코일보다도 더 강한 불세출의 무투가고 그는 평범한 중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태자였던 시절 배운 것들도 거의 다 잊었거나, 열차에선 별 소용없거나, 테슬러도 황궁에서 배워 다 아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니 테슬러가 제국군을 유인하며 황궁으로 떠날 때도 열차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열차 충전을 마치고 황궁으로 돌진할 때는, 그래서 테슬러가 처음 한 약속도 다 잊은 줄만 알았다. 도착했을 때 자기 없이 모든 게 끝나 있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때까지도 클라프로트는 살아있었다. 마지막 숨통을 끊으러 가면서 테슬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클라프로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같이 가자.”
클라프로트가 얼마나 끔찍하게 타락했는지, 자신이 준비한 질문도 지금의 그에게는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덕분에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충격으로 갈팡질팡하다가 테슬러와 코일을 따라 재빨리 뛰지 못했다. 그래서 지하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클라프로트를 돌무더기 속에서 꺼내주지도 못했다.
결국 도움을 요청하러 열차로 돌아간 사이, 테슬러를 구한 건 어이없게도 그 디스티였다.
테슬러가 완전히 무관한 남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다른 병사들처럼 총통을 따르며 열차 생활을 이어가는 게 충분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테슬러는 남이 아니었다. 그 혼자만의 일방적인 생각이라 해도.
가족과 친해지지 못하고 서먹한 것은 이 나이가 되어도 외롭고 괴로운 일이었다.
“테슬러~”
패러데이가 찾아갔을 때 테슬러는 자기 방에서 뭔가 집중해 읽고 있었다. 그가 읽는 책치고는 얇은데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했다.
“뭘 그렇게 읽는 거야?”
“뇌과학 논문.”
대답만 하고 다시 집중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테슬러는 금방 논문을 내려놓았다.
“최신 논문이라 기대했는데 역시 라보라 사막에서 가져온 디스티의 논문만 못해. 이번에도 허탕이야.”
답지 않게 한숨까지 쉬는 테슬러의 눈밑이 푹 패었다. 그 꼴을 보며 패러데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안 되겠다. 좀 쉬자.”
“응?”
“쉬어야겠다고. 너랑 코일이랑, 대원들 전부 다 휴가가 필요해.”
테슬러는 대답에 앞서 묘한 눈으로 패러데이를 올려다보았다.
“세레스가 건의한 거야? 쉬자고?”
“먼저 말 꺼낸 건 세레스가 맞아. 하지만 그가 말 안 했으면 내가 건의했을 거야.”
테슬러의 표정을 보고 패러데이가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레스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클라프로트와 닮아서 그래?”
세레스는 열차에 탄 후로도 꼬박꼬박 머리를 물들였다.
그래도 아는 눈으로 곰곰이 뜯어보면 클라프로트와 닮은 부분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황제의 얼굴 같은 건 신문으로만 본 패러데이도 알 수 있을 정도니, 테슬러의 눈엔 그야말로 클라프로트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얼굴 때문만이 아니야.”
뚱한 얼굴로 테슬러가 대답했다.
“난 그 사람 열차에 태울 때 분명히 말했어. 우린 가족이 아니라고. 그땐 본인도 동의해 놓고서 며칠도 안 지나서 형 노릇 하려고 해. 난 그냥 다른 대원들과 똑같이 대하고 싶을 뿐이야.”
“나쁜 뜻에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는 너랑 코일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어.”
“알아.”
패러데이가 더 말하기 전에 테슬러가 먼저 말을 이었다.
“지금 그 양반이 의기소침한 건 나 때문만이 아니야. 황궁에서 클라프로트와 대면했을 때, 그의 귀엽던 동생에게 상처를 꽤 많이 받았어. 그런 건 옆에서 위로 좀 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
머뭇거리던 패러데이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휴가 건의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테슬러는 내려놓았던 논문을 다시 집어 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