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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모험

Summary:

빛의 전사 사율다르 대죄식자 IF

Notes:

(See the end of the work for notes.)

Work Text:

그들은 고치를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린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영웅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영겁 같은 변화가 끝나고 프레이 모습을 한 어둠의 마지막 발버둥도 소멸했다. 유래 없는 힘의 대죄식자가 된 어둠의 전사는 모든 죄식자들을 이끌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초대한 명왕에게는 안타깝게도 아모로트는 한동안 북적일 예정이었다.

그 세계가 천천히 기울어 결국은 멸망할 때까지.

 

죄식자가 된 영웅은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쉬며 보냈다. 그동안 놓친 휴식을 취하겠다는 것처럼. 에메트셀크는 종종 그 모습을 구경했지만 무슨 말로 비꼬아도 대답도 없는 영웅에게 질렸는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늘어났다. 영웅이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 무엇을 할 자아가 남아있는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모로트의 죄식자들은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영웅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단조차 닳아 없어져 가고 있는듯했다. 정상적인 에테르를 섭취하고 싶은 충동을 더는 참지 못하게 된 게지, 에메트셀크는 평했다. 하데스의 복수는 실현되려는 듯 보였다. 보는 자이자 과거의 거품 휘틀로다이우스는 침묵했다.

이변이 생겼다. 대죄식자가 입을 열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사과였다. 휘틀로다이우스는 들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역시 안 되겠어요. 죽지 않았으면 하는 데 어디에 선악이, 옳고 그름이 있겠나요. 내 마음대로 그런 걸 판단해버려서 미안해요. 하지만 살리고 싶어요. 불완전한 존재들이어도 죽게 두고 싶지 않아요. 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리를 떴던 에메트셀크가 돌아와 그걸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사과를 토해냈다. 이번에는 그를 도와줄 미스트도 없었다. 노라크시아 등불이 꺼진 날 손수 수습했던 새벽의 시신들 문브뤼다 오르슈팡 이젤 민필리아 파파리모 그리고 또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등에 진 빛의 전사는 고대인과 불완전한 존재 중에 그를 배신하고 상처입히고 부담지우고, 그럼에도 사랑하며 위로하고 구하려고 시도한 불완전한 인간을 택했다.

대죄식자가 되어서도 마법을 쓸 수 있을지 영웅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공기가 새삼 무겁게 몸을 눌러왔다. 무얼 꾸미는지 에메트셀크가 알아챈다면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리가 없었다. 또다시 실패해서는 안 되니까, 영웅은 생각했다.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고. 이제 아름답지도 않아, 여름 아이 같을 수도 없고 인간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자신 대신 조가비 왕관을 쓴 요정의 애정이 여전하다면.

나의 아름다운 가지. 그는 안개꽃의 날숨처럼 얕게 요정왕을 불렀다.

나의 어린나무! 페오 울은 이번에도 늦게 자신을 불렀다며 타박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면 좋아, 너무 끔찍해! 작은 요정의 모습이 대죄식자의 뺨에 작은 손을 얹었다. 요정왕이 된다면 여기서 도망칠 수 있어. 원해서 있는 것 같지만... 아파하고 있잖아? 네가 원한다면 왕관과 지팡이, 구두를 너에게 줄게. 맑은 종소리가 상냥하게 보호를 약속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겠지만, 아무렴 어때? 요정왕의 말은 너무 다정하고 달큰해서 대죄식자의 머리가 한낮의 졸음기에 취한 것처럼 기울어졌다.

농담이야! 매정해. 거절할 거면서 그런 표정이라니.

이제 변할 수 없는 얼굴에서 무언가 읽어낸 걸까. 거절도 승낙도 하기 전에 요정은 이미 영웅의 본심을 눈치채어 다시 한번 타박했다. 사과의 말이 입을 떠나기 무섭게 요정왕은 됐다며 새침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 끝엔 잠시면 털어버릴 미련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요정왕의 도움을 약속받고 영웅은 죄식자들을 불렀다. 희고 빛나는 무리가 후광처럼 모여들었다. 그동안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죄식자들은 발버둥 치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수정공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아모로트에 그들을 데리고 올 때 이리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아르버트가 말했다. 그게 네 의지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갈 힘을. 한번 희생을 겪어본 사람이라 그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영웅이 대리석상처럼 멈춰있었을 때부터 그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괜찮냐는 질문, 걱정, 다그침, 위로. 그렇게 조금씩 부스러지고 물러지던 기물은 덕분에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페오 울이 잠시 모습을 감췄을 때, 어둠의 전사였던 이가 처음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다른 영혼은 알아챌 수 없었던 오랜 대화 끝에 아르버트는 또 다른 빛의 전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렁이던 빛이 정돈되고 한층 명확한 정신으로 영웅은 에메트셀크의 배신당한 표정을 마주했다. 무언가를 기대했던 걸까. 영웅의 짐작은 틀릴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단지 맞설 힘을 모았다.

어느 쪽이 최후의 반역자가 될 것인지 가리려 빛과 어둠이 싸움을 벌일 때 말을 흉내 낼 수 있는 죄식자가 수정공에게 간단한 전언을 남겼다. 그라하 티아는 절망 속에서도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남모를 희망을 품었다. 이윽고 구속이 끊어지고, 다치고 지친 수정공은 그의 별에게로 향했다.

거대한 충돌이 불변하며 사그러들던 바다 깊은 곳을 흔들었다. 죄식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갈가리 찢겨 계절이 흐르지 않는 아모로트에 눈처럼 내렸다. 몇 번이고 빛과 어둠이 부딪혀 대기와 바다를 뒤흔들었다.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선 에메트셀크를 두고 대죄식자는 날개를 펼쳤다.

그 싸움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거리에서 휘틀로다이우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의 마법이 영웅을 빛냈고 어느새 합류한 수정공을 손에 든 채 날아가는 대죄식자의 비행에 속도가 더해졌다.

반역자로 기록될 게 누구일지 알 수조차 없으면서도 다만 어둠 한 점 없는 저 하늘로-

영원한 대낮의 주민들은 대죄식자의 등장에 공포에 질렸다. 대죄식자는 빛과 깃털 조각을 떨어트리며 모두의 마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크리스타리움의 방어벽이 올라갔고 탑의 높은 방에서 라이나는 한때 수정공이 보던 것을 바라보았다.

별이었던 것. 방어벽으로 올리기 위해 들어간 성견의 방에서는 대죄식자가 비치고 있었다. 라이나의 굳은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무표정하게 제자리에서 날개짓하는 대죄식자의 손에 라이나가 아는 실루엣이 앉아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지 거대한 손가락을 꼭 잡은 그는 언뜻 보면 그것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내려쓴 후드 아래서 입이 움직였다.

수정공의 입 모양을 읽었다. 라이나 그곳에서ㅡ

라이나는 계단을 뛰고 또 뛰었다. 수정공을 구해야만 했다. 죄식자가 되기라도 하면... 그런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크리스탈 타워에서 나온 그에게 보인 건 거대한 마법의 징조였다. 탑은 하늘을 가르는 빛을 내질렀고 방어 준비를 돕던 새벽의 사람들이 저마다 믿을 수 없다며 절망했다. 성공할 수 없는 이 마법은 그들이 이미 한 번 본 것이었다. 야슈톨라는 누구보다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렸다. 그다음이었던 위리앙제는 죄책감에 잠겼다. 설명을 들은 린은 더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을 거라며 자괴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산크레드는 그를 위로하고 자신의 슬픔을 후순위로 놓았다. 알리제는 수긍할 수 없었다. 알피노는 말을 아끼고 그를 감쌌다.

마침내 빛이 사라졌을 때, 요정의 날갯소리가 흩어지고 안식의 어둠이 별빛과 함께 모든 것의 종결을 전언했을 때, 기쁨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남겨진 자들에게 으레 그렇듯 생존의 기쁨보다 우선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항상 남아있는 이의 역할을 하던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그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건지 떠나버렸다. 차원의 틈 사이로, 빛이 소멸하는 곳으로. 그를 사랑해준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돌의 집에서 프라민은 문뜩 아실리아를 떠올렸다.

그라하 티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영웅은 마지막 모험을 떠났다.

그들의 모험은 영원히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험은 어디까지나 계속되는 거니까.

Notes:

결말부는 < 우화를 기다리며 https://posty.pe/ekzryr >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