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s

Work Header

Rating:
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Characters:
Additional Tags:
Language:
한국어
Series:
Part 7 of 미친 시간 연작
Stats:
Published:
2016-06-28
Words:
1,308
Chapters:
1/1
Comments:
2
Kudos:
36
Hits:
1,290

윈윈 전략

Summary:

머더샌즈는 인간에게 윈윈 전략을 제안합니다.

Notes:

* 윈윈 전략: 교착 상태에서 협상을 통해 상호 승리를 추구하는 전략

Work Text:

인간이 걷고 있는 복도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마구잡이로 구겨지고 패인 바닥이며 벽에는 군데군데 검게 그을린 자국이 뚜렷했다. 떨어져 나간 금속판 아래 드러나 있는 전선의 절단부에선 스파크가 파직 대며 튀어 올랐다. 인간의 걸음걸음마다 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인간은 머리를 헝클이다 짜증섞인 소리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인간에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또 늦었다는 뜻이니까.

이어지던 걸음은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절그럭대는 소리와 날카로운 금속음, 고함들에 멈췄다. 여기서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간은 혹여 기회가 되면 기습이라도 해볼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럴 기회는 없었다. 인간의 붉은 영혼이 푸르게 변하고 맞은편 벽에 메다 꽂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어서 파란 뼈다귀가 날아와 어깨에 박혔다. 능숙한 솜씨였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꽤 늦었네."

벽에 뼈로 못 박힌 인간의 시야에 낯익은 형체 뒤로 무너져내리는 나이트 나이트가 보였다. 주인 잃은 메이스가 주인의 먼지로 한층 두꺼워진 먼지 위로 쿵 하고 떨어졌다. 인간은 날아드는 먼지에 눈을 찌푸렸다.

"청마법, 뭔지 잘 알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쨌든 이걸로 코어도 끝. 이제 포기하지 그래."

인간은 어깨에 박힌 뼈를 빼내려다 고통에 그만두곤 말했다.

"내가 포기할 거 같아?"
"넌 날 못 이겨.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네 LOVE가 6에서 멈춘 게 벌써 몇 번째야? 분명 열 번은 넘었을걸. 헤, 내가 해야 할 일은 참 잘하는 거 같다니까. 안 그래, 팝?"
"미친 뼈다귀 같으니. 안 죽이고 뭐 하는 거야. 또 전처럼 있지도 않은 동생이랑 이야기하면서 날 조롱하려고?"
"아니, 심도있는 대화 좀 나눠보려고."

인간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빈정댔다.

"하, 이 꼴로 만들어놓곤? 미친놈답네. 퍽이나 그러고 싶겠어."

샌즈는 피식 웃곤 주위에 뼈다귀들을 불러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인간을 겨냥했다. 그러자 다른 뼈다귀들도 일제히 인간을 위협적으로 노렸다. 샌즈는 가까이 다가온 뼈다귀들을 불쾌하게 바라보는 인간에게 말했다.

"비협조적으로 굴긴. 어깨에 박힌 거 말고 몇 개 더 필요해? 난 이런 쪽엔 취미 없는데. …쉿, 파피. 그렇게 웃지 마."
"후, 망할 뼈다귀 같으니. 할 말 있으면 해."

샌즈가 손에 든 뼈다귀를 뒤로 던지자 인간 주위를 흉흉하게 떠돌던 뼈다귀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할 말은 이거야. 다음번엔 아무도 죽이지 마. 그럼 나도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어때, 윈윈전략. 좋은 제안 아냐?"
"이제 와서 협상이라니,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

샌즈는 후드를 벗고 소매로 뺨에 튄 피를 닦아냈다. 그의 안광은 어느새 예전처럼 희게 돌아와있었다.

"숨기는 건 없는데."
"거짓말."
"정말이야."
"날 이해시켜 봐."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무언가를 골몰하던 샌즈의 안광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긴 침묵 뒤에 샌즈는 약간 쉰 목소리로 답했다.

"난 지쳤어."

샌즈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시간선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갔지? 짐작도 못 하겠어. 하도 지겨워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네가 겪어봤으니 알겠지. 난 인간,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버티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시간선 동안 바뀐 게 있던가? 다들 죽고 또 죽지."

샌즈는 허공에 팔을 뻗어 없는 것을 잡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내 동생도. 죽이는 놈이 누군지만 바뀌었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잖아. 그래, 하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하하, 하…."

인간은 공허한 웃음을 들으며 샌즈가 정말 해골 같다고 생각했다. 생명 한 점 없는 그냥 해골. 웃는 입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누군가 그린 그림처럼 그저 그곳에 있기만 했다. 그려진 입이 달싹였다.

"…이 의미 없는 짓을 언제까지고 반복하기만 할 순 없잖아. 이제 끝낼 때가 됐어. 가짜 평화라도 지금보단 낫겠지. 너도 같은 걸 반복하기만 하는 건 지긋지긋할 거 아냐. 전부터 표정에 역력하던데."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긴. …뭐, 좋아."
"그럴 줄 알았어. 헤, 그럼 이제 시간을 되돌려야겠네."
"끝내."
"다시 보자."

순식간에 나타난 가스터 블래스터에 빛이 모였다. 인간은 빛무리 속에서 허공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샌즈를 보았다. 늘 같이 있다고 주장하던 동생에게 하는 걸까. 곧 시간은 되돌아갔다.

 

* * *

 

인간은 눈에 훤한 퍼즐들만 가득한 폐허를 통과하며 샌즈가 했던 제안을 곰곰히 생각해봤다. 내용 자체는 꽤 전부터 바라던 내용이긴 했다. 수많은 몰살 끝에 알 수 없는 변수로 원래였다면 겪을 수 없던 일들을 겪게 된 것은 즐거운 일이긴 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지긋지긋해서 신물이 날 정도였다. 매 리셋마다 끊임없이 달라진다고 한들 그것도 자신의 통제범위 내에 있어야지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죄어오는 것들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 번의 리셋에서 그 해골은 꽤 권태로워 보였다. 그렇게 증오해마지않는 인간을 죽이면서도 즐거워해야 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의무적인 웃음만 짓던 것이 기억났다. 아무리 미친놈이라지만 켜켜이 쌓여가는 세월의 무게는 버틸 수 없었나보다.

인간이 그렇게 결론지을 때쯤 폐허는 끝이 났다. 괴물들을 찾아 죽일 필요가 없으니 폐허 돌파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 플라위가 나타났다.

"그 똥자루의 말을 순순히 들으려는 거야? 신기해."
"플라위?"
"사람은 쉽게 안 변해. 걔 동생은 그렇지 않다고 믿어도. 난 널 참 오래 봐왔어. 넌 절대 안 바뀌잖아? 난 네가 나가면 뭘 할지 알아. 하하하…."

플라위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인간은 남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플라위가 있던 자리를 노려봤다.

 

* * *

 

폐허를 나서는 인간은 먼지 하나 묻지 않아 깔끔한 옷을 내려다보며 낯설다고 여겼다. 이게 얼마 만이더라. 지하가 그리 미치지 않았을 때,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 그 미친 해골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몇 번 시도했던 후로 처음일 것이다. 아무리 시도해도 살해를 멈추지 않는 건 같아서 그만두었지만.

익숙한 발소리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인간은 파피루스가 만든 다리 앞에 서서 샌즈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흠, 친구 사귀는 법을 모르냐고 묻긴 싫은데."

인간은 뒤를 돌아봤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샌즈가 보였다. 늘 깊게 눌러쓰던 후드도, 부연 먼지도, 흉흉한 안광도 없었다.

"좀 멀지 않아, 뼈다귀?"
"믿을 수가 없잖아. 너도 마찬가지 아냐?"

샌즈는 다리를 건너가라는 듯 턱짓했다. 인간은 그 지시에 따르며 말했다.

"너한테 골탕 먹은 적이 한 두 번이었어야지."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신경전 할 시간 없어. 곧 파피루스가 올 거야. 자, 등불 뒤로 가."

인간이 등불 뒤로 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피루스가 나타났다. 익숙한 비난과 말장난이 이어졌다. 워낙 많이 들은 대화라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인간은 팔짱을 끼고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파피루스가 웃으며 떠나고 샌즈가 그를 불러냈다.

"좋아, 이제 나와도 돼."

샌즈는 정말로 즐거운 듯했다.

"꽤 즐거워 보이네?"
"헤, 오랜만이니까. 이렇게 팝이랑 농담하는 건. 가 봐. 심판의 복도까지 먼지 하나라도 묻으면…. 알지? 이대로 가자고."

인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하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샌즈가 있어야 할 곳에 없었던 것만 빼면. 워터폴에서 샌즈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은 파피루스를 죽인 것도 아닌데 그 해골이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의아해했다. 인간은 붉은 물감이 칠해져 있는 망원경 옆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녜헿, 인간! 드디어 전화해줬구나!"
"응. 파피루스, 미안한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
"당연하지! 친구 사이에 미안할 게 뭐 있어."
"여기 워터폴…. 초소 앞인데 샌즈가 자리에 안 보여서."

작은 한숨이 들렸다.

"샌즈 형? 지금 소파에서 TV 보고 있어. 오늘 휴가 냈다더라. 분명 며칠 전에도 휴가라면서 쉬었던 거 같은데 말이야. 초소 근무가 이렇게 쉴 날이 많은 일인지 몰랐어."
"휴가?"
"응. 그래서 오늘은 종일 나랑 놀겠대. 아, 물 끓는다. 이만 끊을게, 인간!"

종일 파피루스랑 놀겠다니. 어쨌든 파피루스에게 전화만 하면 샌즈가 뭐 하는 지 알아낼 수 있으니 나쁜 건 아니었다. 인간은 지하를 지나며 샌즈가 없는 곳을 볼 때마다 파피루스에게 뭐 하고 있냐고 전화를 걸었다. 파피루스는 형과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고-인간은 자신 몫까지 샌즈에게 대신 주라고 부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을상으로 소파에 늘어져있는 형은 내버려두고 혼자 장 보러가는 길이었고-인간은 짓궂게 웃었다-, 신나게 눈싸움하다가 눈사람 형제를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파피루스는 형이 눈사람다운 눈사람을 만드는 건 처음이라고 나중에 와서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인간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 * *

 

인간은 심판의 복도에 들어서서야 샌즈를 만날 수 있었다. 방금까지도 스노우딘에 있었는지 외투에 흰 눈이 묻어있었다. 인간이 혹여 먼지인가 미심쩍게 쳐다보자 샌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곤 외투를 벗어 던져줬다.

"참 의심 많은 친구라니까. 자, 눈 맞지?"
"눈 맞네. 털지도 않고 올 정도면 꽤 바빴나 봐?"

인간은 외투를 살펴보고 다시 샌즈에게 던졌다. 샌즈는 외투를 낚아채서 입고 뒤집어진 후드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 '본'분도 잊고 동생이랑 노느라 바빴어. 앞으로도 바쁠 거 같아. 어쨌든 여기까지 LV는 하나도 안 올리고 왔네. 잘했어."
"칭찬 들을 줄은 몰랐는데."
"잘한 건 잘한 거니까. 음, 더 할 말은 없네. 난 간다. 좀 이따 봐."

샌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샌즈가 사라진 걸 확인한 인간은 복도를 걸으며 누가 볼까 고개 숙이고 소리 죽여 웃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상에 나가면 의지 가진 괴물의 기억마저도 없던 것처럼 지울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플라위는 이걸 예상했던 걸까. 인간은 황금꽃이 가득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눈 부셔 눈을 감았다. 바람이 그런 인간을 스쳐 지나갔다. 묵직한 쇳덩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좀 이따 보자고 했지?"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그만 '본'분으로 돌아가야지. 계속 비워둘 순 없잖아."

먼지 더미에 올라선 샌즈 뒤로 보라색 망토가 나풀대며 떨어져 내렸다.

"덕분에 동생이랑 잘 놀 수 있었어. 고마워, 인간. 어차피 너도 좋은 의도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잖아? 이런 건 먼저 배신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지."

보라색 안광이 피어올랐다.

Series this work belongs 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