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소개 안 받을 거냐?”
“관심 없다고 했잖아.”
사와무라의 거절에 그와 같은 구단 외야수 야마모토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주말 저녁의 고깃집은 만석이라 시끄러웠다. 바로 앞에 앉아 있어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고함치듯이 말해야 했다. 모두가 크게 떠들어대니 가게 안은 점점 더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와무라는 연기와 고성으로 칼칼해진 목을 술로 달랬다. 평소 잘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마셨더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취기가 훅훅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말 조건 괜찮은 여자야. 무려 야구를 좋아하는 여배우라고. 야구 좋아하는 여자가 좋다고 했지? 형님이 딱 네 취향으로 구했잖아. 너도 이제 슬슬 자리 잡고 결혼해야 하지 않겠냐.”
사와무라가 완곡하게 거절해도 야마모토는 끈질겼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싫어 사와무라는 번번이 술자리를 피하거나 일찍 떴지만, 오늘은 술자리가 그의 도피처였기 때문에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만나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그만해라, 이제.”
사와무라가 정색하고 대놓고 거절해도 야마모토는 술에 단단히 취한 것인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다.
“만나는 사람 누구? 똥파리 꼬이는 거 막으려고 그냥 핑계대는 거 아니고? 누군지 얼굴 좀 보여줘 봐. 그러면 납득하고 그만한다. 진짜로. 사와무라 에이준이 만난다는 소문의 여자 얼굴 좀 보자고. 신기루인지 아닌지.”
“야, 야. 취했어. 그만해라. 싫다는 사람 붙잡고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나한테 소개해 줘. 나 얼마 전에 차였어.”
“아니, 그 만난다는 사람 핑계도 몇 년째야? 좀 사람 바꿔서 말하는 성의라도 보이든지, 한 사람을 10년? 8년? 몇 년이야?”
“4년이라고.”
“그럼 8년은 뭐야?”
“아는 사람하고 동거하는 게 8년이고.”
“8년이든 4년이든 몇 년을 만나고 있다면서 소개 한 번 안 해주는 게 말이 되냐? 결혼도 생각했다면서? 닳냐? 어? 닳아?”
“어, 닳아.”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미인에 몸매 좋은 연상 애인 좀 보여달라고오오.”
“술이나 먹어, 인마.”
사와무라가 야마모토의 잔에 술을 넘치기 직전까지 따라주었다.
서른 전후로 나잇대가 비슷한 같은 구단 사람들끼리의 회식 자리였다. 기혼이거나 결혼을 앞둔 경우가 대다수였으므로, 다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주로 나오는 화제는 두 가지였다. 험담을 빙자한 마누라 및 자식 자랑, 빨리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신세 한탄.
이렇게 보면 얼굴이 술로 시뻘개져서 횡설수설하는 한심한 아저씨들 같지만, 이 자리의 사람들은 모두 수입이 높은 프로 1군 야구선수들이었다. 돈, 명예, 단련된 신체 삼박자를 고루 갖췄으니 애인과 헤어졌거나 자발적으로 연애를 쉬고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 애인이 있었다. 사와무라도 마찬가지였고,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그냥 존중해 주면 될 것이지 주변에선 사와무라가 세간에 밝힐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위험하고 스릴 넘치는 연애를 하고 있거나, 결혼 얘기를 듣기 싫어 그저 핑계를 지어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상상 속의 그대인지, 현실에 존재하는 그대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헤어진 거 아니야?”
야마모토가 빈 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주위에서 만류해도 야마모토는 고집을 부렸다.
“최소 분위기 안 좋거나. 그러니까 술자리도 이렇게 나온 거잖아. 평소에 술자리 단속하던 여친이 이제 신경 안 쓴다? 마음이 식은 거지. 여친이 단속하는데도 무시하고 나왔으면 네 마음이 식은 거고. 근데 네가 이렇게 구는 걸 보면 여친이 식은 것 같은데, 맞지? 너도 느끼고 있지? 그 여자는 애초에 너랑 결혼할 생각 없는 거야. 한창 잘나갈 때 네 프러포즈를 거절했으면 알만하지. 그런 여자한테 차이느니 그냥 네가 버려. 구질구질 매달리는 건 사와무라답지 않잖아. 안 그래?”
사와무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주변에서 담배 좀 태우고 온다고 아예 야마모토를 끌고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옆에 다가와 “야마모토는 무시해”라며 술잔을 채워주고 어깨를 두드리고 갔다. 사와무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입이 썼다. 괜히 손으로 허벅지를 문질렀다. 불룩 튀어나온 휴대폰 윤곽이 만져졌다. 꺼낼까 하다가 말았다. 몇 시간째 잠잠했는데 인제 와서 연락이 왔을 리 없었다.
술자리는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끝났다. 애초에 술 마시자고 모인 자리였으니 술을 안 마신 사람이 없어서 다들 대리운전이나 택시를 불렀다. 강수 확률이 낮다던 일기예보를 비웃듯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발이 제법 굵어서 다 같이 삼삼오오 처마 밑에 모여 차를 기다렸다.
서늘한 비바람을 맞자 사와무라는 몸을 옹송그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기분 좋게 마신 술도 아니지만 왁자지껄한 곳에 있다가 한순간에 조용한 곳으로 옮기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역시 예상대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평소 귀가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도. 원래도 연락이 잦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늦게까지 소식이 없으면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던 사람이었는데……. 상대가 연락을 안 하면 사와무라 쪽에서 하면 될 일이긴 했다. 사와무라의 손이 수화기 버튼 위를 맴돌았다. 자고 있으려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사와무라가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남은 이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기분 전환 하려고 홧김에 나온 자리였는데 괜히 나왔다 싶었다. 어린애처럼 박차고 집을 나오는 게 아니라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대화해야 했는데. 어엿한 성인이 된 지도 수년이 지났는데 그의 앞에서는 번번이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목적지를 말하자 차가 출발했다.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창문에 뺨을 대도 택시 내부의 훈훈한 온기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몸이 노곤해졌다. 알게 모르게 종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피로가 쏟아지며 졸음이 밀려왔다.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왔다.
“비는 내일 오전까지 계속될 예정입니다. 호우주의보가 발효되는 곳이 있겠습니다. 비가 오며 기온이 뚝 떨어졌는데요, 내일 아침 기온은…….”
클락션이 울리는 소리에 까무룩 잠들었던 사와무라는 번쩍 눈을 떴다. 택시 기사가 욕설을 내뱉었다. 와이퍼가 삐걱삐걱 닦아낸 창문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다시 시야를 가렸다. 그 틈으로 저 앞에 빗길에 미끄러지는 승용차가 보였다. 동시에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났다. 클락션이 머리를 울렸다.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늦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면 주마등이 펼쳐진다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택시가 앞차를 들이받는 순간 사와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기 전 마지막 생각이라기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전화할걸…….
-
다리가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거웠다. 사와무라는 눈을 떴다. 해를 정면으로 본 것처럼 눈이 따가워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흰색 천장이 보였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갈색 정수리가 보였다. 눈을 여러 번 감았다가 뜨자 차차 흐릿한 초점이 맞춰졌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사와무라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래서 다리가 무거웠군. 보이는 건 정수리뿐이라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가만히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은 잘 움직이는데 남자의 머리 때문인지 다리가 저려 발가락을 움직이자 찌릿찌릿했다.
사와무라는 남자를 부르려고 했다. 이름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나오는 것은 쉭쉭거리는 쇳소리뿐이었다. 그뿐이었는데도 남자는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알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에이준?”
남자는 번쩍 몸을 일으키더니 한걸음에 다가와 사와무라의 손을 잡았다. 한쪽으로 기대고 자서인지 안경이 삐뚤어지고 한쪽 머리가 눌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우스워하기에는 남자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여러 감정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안도, 걱정, 불안…….
사와무라는 남자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이 슬고 때가 낀 톱니바퀴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사와무라는 남자의 손에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의도가 전해졌는지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기는…….”
“병원이야.”
남자는 사와무라가 이해하기 쉽도록 차분하게 천천히 말했다. 병원이라는 것은 눈을 뜬 순간 느껴진 특유의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예상이 맞았다.
“무슨……”
사와무라는 최근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다.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무언가 기억해 보려고 하면 머리의 통증이 심해졌다. 송곳으로 머리를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였다.
“에이준, 괜찮아?”
남자가 사와무라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흐려지는 것은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의식도 흐려졌다. 시야의 주변부터 시시각각 까맣게 죽어가며 여러 감정과 통증이 뒤섞여 파도쳤다. 사와무라는 남자의 손이 폭풍우 속 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식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당신은……? 내 이름은 어떻게…….”
황망하게 묻자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의사 선생님인가요?”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의사가 고작 환자 하나의 병상을 지키고 있을 리 없었지만, 가족도 친구도 아닌 사람이 병원에 있다면 달리 누구란 말인가.
“아니. 이제 부를 거야. 눈 감고 있어, 무리하지 말고. 괜찮아질 거야.”
남자가 사와무라의 등을 쓸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바라보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쩐지 꾸며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의식을 잃었다.
-
사와무라는 눈을 떴다. 눈을 뜨기 전부터 병원 특유의 냄새로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여 봤다.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이 일련의 행동에서 기시감을 느꼈지만 꿈으로 치부했다.
팔다리는 멀쩡하다. 그러면 야구는 계속할 수 있겠지. 일단 안심했다. 주변을 살피니 긴팔 운동복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이 창가에 서 있었다. 사와무라의 구단 관계자 스즈키였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창밖을 보던 스즈키가 시선을 돌렸다.
“일어났어?”
사와무라가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본 스즈키는 그가 일어나기 쉽게 침대 각도를 조절해 주었다. 사와무라는 스즈키가 건네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핵심만 말하면 교통사고야.”
귀가하던 사와무라가 탄 택시가 빗길 사고에 휘말렸다고 했다. 차량은 크게 파손됐으나 사와무라는 검사 결과 이마를 비롯한 이곳저곳의 찰과상을 제외하면 멀쩡했다.
스즈키에게 사고 경위를 듣던 중에 사와무라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의사가 찾아왔다. 구단 지정 병원이라 안면이 있는 초로의 남성이었다. 그는 관계자에게 대충 전해 들었던 검사 결과를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섞어서 주르륵 나열한 후 거듭 천운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와무라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야구는 계속할 수 있습니까? 야구하는 데 지장이 있을까요?”
의사는 또 이런저런 전문 용어를 한참 늘어놓았다. 결론은 야구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사고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 한동안 격한 운동은 자제하시는 게 좋고요.”
사와무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동안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일까요?”
“기본 4주인데 일단 2주 지나고 경과 봅시다.”
“오프 시즌이라 다행이네.”
스즈키가 말했다. 동감이었다.
“퇴원은 언제부터 가능한가요?”
사와무라가 물었다.
“원하신다면 바로 수속 밟으셔도 되긴 하는데 혹시 모르니 하룻밤 더 지켜보시는 게 좋고요.”
“그렇게 할래?”
스즈키는 사와무라가 좀 더 입원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사와무라는 한시 빨리 병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운동선수에게 병원은 기분 좋은 곳이 아니었다. 좋은 소식을 들으러 가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병원이 의미하는 것은 대개 두 가지. 재활 아니면 은퇴였다. 이번 경우에는 전자이길 다행이었다. 의사의 말대로 천운이었다.
스즈키가 퇴원 수속을 밟으러 간 사이, 사와무라는 환자복을 갈아입으려고 병상 옆 탁자에 놓인 쇼핑백에 손을 뻗었다. 바로 집으로 가서 일단 좀 쉴 생각이었다.
원래 입던 옷은 사고로 못 쓰게 되어 스즈키가 집에서 새로 가져왔는지 쇼핑백에는 편안한 트레이닝복 바지와 긴팔 티셔츠, 후드 집업이 들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즈키 말로는 사고가 났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정도는 뉴스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분명 걱정하실 것이었다. 괜찮은 얼굴을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영상통화로 걸었다. 과연 신호가 연결되자마자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에이준! 이 할아비를 심장마비로 죽게 만들 셈이냐!”
이마의 반창고 때문에 걱정을 사기는 했지만 멀쩡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여드리니 안심하시는 것 같았다.
“나가노로 내려올래? 너무 힘들려나? 엄마가 도쿄로 갈까? 민폐인 건 알지만…….”
당장 짐을 싸서 올라올 기세라 사와무라는 어머니의 말허리를 잘랐다.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멀쩡하다고 했어. 20년 경력에 이렇게 운 좋은 사람 처음 본대. 엄마가 튼튼하게 낳아준 덕분이야.”
좀 괜찮아지면 나가노에 한번 가겠다고 약속한 후 통화를 마쳤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았다. 사와무라는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동차가 우그러지고 사람이 다쳤는데도 휴대폰은 금 하나 간 곳 없이 멀쩡했다.
사와무라는 인터넷에 접속해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교통사고라는 키워드를 넣지 않아도 검색 결과는 온통 자신의 사고 소식뿐이었다. 대부분 사고와 관련 없는 이미지나 사진을 기사에 첨부했지만, 사고 현장 사진을 올린 기사도 있었다. 폴리스라인의 노란색이 쨍했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잔상이 남는 것 같았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자동차, 깨진 조명의 파편들, 사고 위치를 표시한 아스팔트 위 흰색 페인트. 자동차 시트에 묻은 혈흔. 저기에 내가 있었다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난 이렇게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데.
산산조각이 난 유리창 사진 아래 기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야구선수 S는 의식불명으로 병원 이송 후 회복 중, 사와무라가 탔던 택시의 기사는 병원에 이송됐으나 중태, 사와무라를 친 운전자는 즉사.
사와무라는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사진을 더 볼 수 없어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자 댓글들이 나왔다. 광고 댓글 하나, 뜬금없이 정치인 욕을 하는 댓글 하나를 넘기니 눈에 띄는 ‘다 죽었거나 죽기 직전인데 혼자만 용케 안 죽었네.’라는 댓글 하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렇게 큰 사고였는데 왜 나만 안 죽었을까요? 왜 멀쩡한 거죠? 멀쩡한 게 아닌 거 아니야?
사와무라는 인터넷 창을 닫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순간 현기증이 일어 벽을 짚었다. 손바닥을 댄 벽이 점점 자신을 덮쳐 오는 것 같았다. 호흡이 빨라졌다. 나가야 했다. 이 방이 좁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사와무라는 벽을 짚어가며 문으로 이동했다.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휴게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사와무라는 차가워진 엉덩이를 문지르며 의자에 앉았다. 키에 비해 높이가 낮아 무릎이 껑충 솟았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숙이고 그 무릎에 팔꿈치를 벽처럼 세웠다. 병실이 비좁아지는 느낌에 벗어난 것이면서 다시 팔로 자신을 가둬버리는 모순적인 행동이었지만 안정감이 들었다.
사와무라는 그렇게 자신이 만든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호흡에만 집중했다. 살아있다, 죽지 않았다, 말해주듯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너만. 너만 살아남은 거야.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천운입니다. 의사의 목소리. 천운 맞나요? 호흡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처음에는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낸 환청인 줄 알았다.
“너 괜찮은 거야?”
사와무라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지 아무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오지랖 넓은 사람인지는 몰라도 남자가 그냥 가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자가 떠나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소리도 없었다.
“괜찮으니까 가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지만 남자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사와무라의 팔을 쿡 찌르며 “부탁 좀.”이라고 운을 띄웠다. 익숙한 대사였다. 사와무라는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사인 못 해줘요.”
사와무라의 말에 남자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물었다.
“농담이지?”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보통 거절하면 순순히 물러나는데 거절했고 병원인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걸 보면 끈질긴 팬인 듯했다. 왜 하필 지금 이런 때에.
“농담 아니라고요. 지금은 진짜로 좀 힘들거든요? 30분 뒤에 1107호로 오면 해줄 테니 가요.”
사와무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어떤 꼴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태가 좋지는 않을 터였다. 과연 사와무라의 얼굴을 본 남자의 눈썹이 실망 때문인지 팔자로 처졌다. 그래도 그의 앞에 선 남자 역시 준수한 상태는 아니었다. 환자복이 아닌 가벼운 옷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뻗친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환자의 가족인 듯했다. 나이는 또래 같았다.
남자는 사와무라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시력이 안 좋은지 그가 쓴 굵은 뿔테 안경은 렌즈가 두꺼워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자신을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백색 형광등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남자의 희게 질린 안색은 음침한 기색을 더해주었다.
“그래, 힘들어 보이네.”
사와무라의 몰골을 보니 진상을 부릴 마음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남자는 혼자 중얼중얼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어쨌거나 사와무라 입장에선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저 남자가 한시 빨리 가줬으면 했기 때문에 스스로 납득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돈 좀 빌려줘.”
“농담이죠?” 이번에는 사와무라가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돈 없어요.”
“동전 한두 푼은 있을걸. 바지 주머니 뒤져봐.”
팔을 뻗는 폼이 자신이 직접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질 기세라 사와무라는 한쪽 팔을 뻗어 남자를 막고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과연 동전이 만져졌다. 남자를 쳐다보자 ‘내 말이 맞지?’ 하는 표정으로 히죽 웃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찍은 거야.”
“동전은 왜요?”
“자판기에서 음료수 좀 뽑아줘. 지갑을 놓고 왔어.”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음료수 자판기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사와무라가 몸을 일으켰다. 원하는 대로 해줘야 남자를 빨리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얻어먹는 주제에 “커피면 돼.” 하고 참견했다. 사와무라는 커피 자판기 앞에 섰다. 동전을 넣었다. 블랙커피, 밀크커피, 핫초코. 밀크커피 버튼을 눌렀다. 덜컥 하고 종이컵이 나왔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액체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와무라의 시선에 남자의 슬리퍼가 들어왔다. 맨발로 오래 있었는지 발가락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시선을 위로 옮겼다.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 바지, 목이 늘어난 티셔츠, 지친 얼굴, 눌린 머리카락. 지갑을 놓고 왔다고 했던가. 분명 병원에 급하게 왔을 것이다.
사와무라는 어쩐지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서 물었다.
“괜찮아요?”
“지금 나한테 물은 거야?”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여기 또 누가 있다고.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의 침묵 후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재밌네. 난 괜찮아.”
“뭐가 재밌는 거죠.”
“환자가 일반인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왜 반말? 사와무라는 불만을 꾹 삼키고 밀크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웃음을 겨우 그친 남자는 사와무라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난 밀크커피 안 마셔.”
“왜요?”
“달아서.”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안 물어봤잖아.”
“아니, 무슨…….”
남자의 손이 사와무라의 손가락을 살며시 쥐었다.
“이제 손이 따뜻해졌네.”
사와무라가 무어라 대꾸하려고 할 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괜찮아질 거야.”
“잠깐…….”
남자는 가겠다는 말도 없이 그냥 손만 한 번 휘젓고 그대로 등을 돌려 가버렸다. 휴대폰이 한참을 더 울리고 나서야 사와무라는 전화를 받았다. 스즈키가 어디냐고 물었다. 사와무라는 휴게실이고 바로 병실로 가겠다고 대답하면서 남자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그건 사와무라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밀크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목을 타고 배로 퍼졌다. 훈훈한 기운이 도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얕은 한숨을 내쉬던 사와무라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호흡이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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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로 돌아오니 스즈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전달받고 짐을 챙겼다. 당연히 스즈키의 차를 타고 집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와무라에게 스즈키가 말했다.
“미유키 씨가 데리러 왔으니까 같이 가면 돼.”
“미유키?”
“그래, 한참 전에 연락했는데 왜 안 오나 했더니 이제 도착했대. 1층에서 기다리겠다네.”
사와무라는 이마를 긁적였다. 반창고를 붙여놓은 곳이 간지러웠다.
“누군데요?”
“농담이지?”
오늘 여러 번 듣게 되는 질문이었다.
“아닌데요.”
스즈키가 정색하고 사와무라를 쳐다봤다. 사와무라도 멀뚱멀뚱 스즈키를 쳐다봤다. 5초 정도 지났을까. 스즈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모르는 척하기는, 미유키 씨와 또 싸운 거지?”
사와무라는 웃지 않았다. 구단 관계자가 아는 사람이고, 사와무라를 데리러 올 정도면 그와 가까운 사람일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차라리 농담이면 좋았을지도. 적어도 스즈키에게는 말이다. 역시 완전히 멀쩡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어딘가 고장 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미유키라는 이름을 하고.
미유키.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있었다.
“여자친구인가요?”
사와무라가 조심스럽게 묻자 스즈키는 억지로 웃는 것을 관두었다.
“의사 선생님 부를게.”
사와무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병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사와무라는 생각했다. 그래서 미유키가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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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뒤에 한 남자를 달고 왔다. 눌린 머리에 뿔테 안경. 사와무라의 눈이 커졌다.
“당신!”
사와무라가 외치자 스즈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뭐야, 미유키 씨가 기억난 거야? 역시 얼굴을 보면 기억날 줄 알았어.”
하지만 사와무라가 뒤이어 “저 사람이 미유키예요?”라고 묻자 그 표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안녕, 또 만났네.”
미유키가 산뜻하게 말하자 스즈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또 만났다뇨? 무슨 상황이죠, 미유키 씨?”
“아까 휴게실에서 잠깐 만났는데 저를 기억 못 하길래, 장난치는 건가 싶어서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 척 심술을 좀 부렸네요. 하하.”
역시 아는 사이였군. 모르는 사람의 동전을 대뜸 뜯어가는 이상한 놈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아는 사이라는 걸 몰랐던 사와무라 입장에선 이상한 놈으로밖에 안 보였지만.
사와무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의 앞머리 끝이 젖어 있었다. 세수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저 이상한 남자가 미유키다. 그래서? 이상한 남자에게 이름이 생겼을 뿐 사와무라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
스즈키와 대화하던 미유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고 말하려는데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미유키는 어깨를 으쓱했고 사와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즈키가 같이 집에 돌아가라고 했으니 그가 누군지는 어차피 차차 알게 될 일이다.
“기억 상실이 의심되신다고요?”
의사의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검사가 시작됐다. 질의부터 시작해 뇌 검사도 다시 받았다. 검사를 마친 결과 사와무라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직 저 미유키라는 남자 한 명뿐이었다.
“부분 기억 상실증이에요. 말 그대로 기억 일부를 잃어버린 거죠. 잃어버린 기억은 빠르면 몇 시간, 보통은 몇 주 안으로 돌아오니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하시는 게 좋아요.”
사와무라는 다리를 떨며 어깨너머를 힐끔 돌아보았다. 스즈키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고 미유키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사와무라는 다시 의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날아갔는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냐고요.
“잊은 상대와 같이 시간 많이 보내면서 함께 자주 다녔던 데를 방문한다든지 그러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거고요. 물론 아예 안 돌아오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긴 하셔야 합니다.”
병원에서 더 처치할 방법이 없으니 다시 입원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제 사와무라의 뇌가 기억을 회복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스즈키는 의료진이 떠나자마자 구단과 긴급회의를 하겠다며 서둘러서 갔다. 병실에는 미유키와 사와무라만 남았다. 사와무라는 침묵이 길어지자 괜히 어색해 애꿎은 가방이며 짐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내가 여자친구냐고 물었다며? 여자친구 없는 남자로 만들어서 미안하게 됐어.”
미유키가 히죽 웃었다. 사와무라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내내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누군데요, 당신?”
“네 하늘 같은 대선배님이시다. 선배님, 선배님 부르면서 엄청 따랐는데. 은혜를 잊지 않겠다더니만 이렇게 갚는구나.”
미유키가 연극조로 말했다. 딱히 사와무라를 속이려는 의지조차 없는 성의 없는 말투였다.
“거짓말이지?”
“맞아.”
미유키가 씩 웃더니 사와무라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들 수 있거든요?”
사와무라가 손을 뻗었지만 미유키가 냉큼 몸을 돌려 피했다. 그 기세로 그대로 병실 문을 벌컥 열더니 말했다.
“뭐, 선배인 건 맞지만. 일단은 룸메이트야. ‘같이 시간 많이 보내기’는 쉽게 해결되겠지?”
그리고 또 미소. 웃음이 헤픈 남자였다.
“가자.”
그러고는 사와무라가 대답하기도 전에 혼자 병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순 제멋대로에 사람 성질을 긁는 데 재주가 있었다. 당신은 뭐가 문제냐며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어졌다. 만난 지 24시간도 안 됐는데 사람을 이렇게 열받게 하다니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그렇다고 사와무라가 무작정 휘둘릴 필요는 없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차피 며칠 뒤면 돌아올 기억이라고 해도 지금 그에게는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미유키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완전한 타인일 뿐이다. 룸메이트라고 해도 굳이 낯설고 불편한 사람과 같은 지붕 아래서 며칠을 지낼 필요 없었다. 말만 하면 구단 측에서 얼마든 숙소를 마련해 줄 것이었다. 굳이 구단 측에 연락하지 않아도 사와무라의 수입 수준이면 당분간 지낼 숙소쯤은 경제적으로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병원에 다니기 번거로워지기는 하겠지만 나가노의 본가에 가는 방법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연락해도 됐다.
그래도…….
사와무라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창밖의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때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습하고 서늘하던 밖, 반면 훈훈하던 택시 안, 술 냄새와 택시의 방향제 냄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광고 음악. ……비가 오며 기온이 뚝 떨어졌는데요…… 긴소매 티셔츠 한 장과 무릎이 늘어난 트레이닝복 바지, 맨발에 슬리퍼.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자신의 발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쿵쿵 뛰었다. 병원의 규모가 커서 복도가 넓고 오가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도 오로지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길쭉한 복도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자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먼저 1층으로 내려갔을 줄 알았던 미유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문이 열렸는데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몇 번째 엘리베이터를 보낸 것일까.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옆에 다가가 섰다. 미유키의 시선이 사와무라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엘리베이터가 왔다. 간호사 하나, 환자 둘이 타고 있었다. 2층쯤 내려가자 모두 내리고 미유키와 사와무라만 남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미유키라고 했죠.”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그런 미유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룸메이트라고요?”
“그래.”
“언제부터요?”
“네가 대학 입학할 때쯤.”
8년 전 일이었다. 미유키와 알고 지낸 지 최소 8년은 됐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거짓말인가요?”
“어떨 것 같아?”
“모르죠. 난 당신을 모르니까.”
8년이든, 그 이상이든 미유키와의 시간은 전부 잊었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뿐. 미유키의 말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고 어쩌면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를 알게 된 1시간 동안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 한 말은 대부분 거짓말 아니면 농담이었다.
그렇지만 속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사와무라는 자신이 관찰력이 뛰어나다거나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자신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아닌 척해도 저 사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진심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타고나길 그런 인간이었다. 길어봤자 며칠뿐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자신만 잊힌 상황이 달가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알아온, 소중한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그래서 사와무라는 아는 것은 이름뿐인,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미유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사와무라를 쳐다봤다. 눈썹이 축 처진 것이 당황한 듯했다. 그의 곤란함을 덜어주려는 듯 때맞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미유키가 앞장섰다. 사와무라는 보폭을 조금 넓혀 미유키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정문 앞에 미유키가 부른 택시가 서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 확실히 말하고 싶었다. 사와무라가 걸음을 멈추자 미유키는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렇게까지 진지할 필요 없는데.”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야죠.”
“아니……. 저기, 일부러 날 잊기라도 한 거야?”
“아니거든요? 그런 게 가능하겠어요?”
“그럼 왜 사과해? 일부러 잊은 것도 아닌데.”
“당신만 잊었잖아요. 8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죠. 8년보다 더 오래됐을 수도 있는 거고. 당신을 얼마나 알고 지냈든 당신은 나를 아는데 나는 당신을 잊었다는 건 당신에게 불공평해요.”
사와무라가 잊힌 입장이었다면 서운했을 것이다. 미유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괜찮아.”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괜찮다고요?”
“그래, 괜찮아. 기억 못 해도.”
“농담이죠?”
“맞아.”
“뭐라고요?”
“사실 아니야.”
“아니 진짜 뭐라는 거야?!”
사와무라가 발끈했지만 미유키는 무시하듯 고개를 돌리며 그를 등졌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오히려 생각을 전환해 보라고. 잊어버린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자, 이제 생각 그만. 오늘 하루 치 생각은 다 한 것 같다.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 무리하지 말라고. 이제 제발 좀 집에 가자. 택시비 무섭다.”
미유키가 저벅저벅 앞서갔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사와무라는 잠깐 망설였다. 저 남자를 따라가기로 한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일까? 절대안정은커녕 혈압안정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사와무라는 오늘 처음 본 낯선 사람을, 하지만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일지 모르는 그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휴대폰도 멀쩡하고 몸도 멀쩡했다.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은 집에 가는 길이 아닌 저 남자다. 얼마든지 혼자 돌아갈 수 있고 꼭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사와무라의 몸은 학습된 것처럼 ‘집에 가자’는 말에 이미 그의 등을 쫓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