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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드가 밥차리는 이야기

Summary:

아주 정직한 제목.
모든 문제가 아무튼 전부 해결된 평화로운 지구를 배경으로, 부활한 타키온이 딸과 함께 스타가디언 전 돌격대장을 상대로 밥찵여를 시전한다.

Work Text:

스타가디언. 메탈카드봇들을 지키기 위해 데우스 마키나의 명을 받들어 적과 싸우는 자들.
적이라 함은, 마키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 예컨대 범죄자들, 이름난 도적단, 행성급 골칫덩어리인 무법자들, 그리고 가장 흔하게는, 와일드카드봇들.
그런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최전방 중에서도 가장 험한 자리에서 적들과 한데 섞여 뒹구는, 그런 위치가 바로 돌격대장.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범한 마음가짐으로 가능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호기롭게 최전선에 지원한 이들은 십중팔구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고 제대당하거나 마음에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고 사직해버리기 일쑤였다.

허나 세이버나이트는 그 짓을 질리도록 오래 해 왔다. 짐승 도살자라는 영 기껍지 않은 이명을 얻고, 수많은 신입들이 적습에 쓸려나가 갈아치워지기까지, 아주 구역질나게 오랫동안.
모두들 그의 비결을 궁금해하곤 했다. 자신에 대해 썩 좋지 않은 뒷말들이 오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진급에 미쳐 성과를 내려 안달인 야심가', '상대의 코어메탈을 도륙할 때마다 흥분하는 변태', '와일드카드봇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복수귀'...
가십을 좋아하는 수다쟁이들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틀렸다. 궁금하긴 하겠지,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격정에 휩싸이지도 뒤틀리지도 않은 채 지낼 수 있었는지.
물론 세이버나이트— 아니, 사바나드 본인은 정답을 매우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대단한 비밀은커녕 헛웃음이 나오는, 참으로 바보 같고 시덥잖은 이유였다.

 

 

"마! 세이버나이트야! 퍼뜩 대답 안 하나!"

"아."

...이런 일상. 그녀와, 딸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나날. 이런 희망을 품어버렸기 때문이지.

"엄마, 이제 사바나드라 불러 달라고 안 카드나. 세이버나이트라 카믄 다른 와일드카드봇 아들이 아주 염병을 해싼는다 아이가."

"아이고, 맞다. 그랬제. 어색해갖고 영 적응이 안 되네."

머리를 잠시 긁적인 타키온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도끼눈을 뜬다.

"니 혹시 옛날 이름으로 불렀다고 일부러 대답 안 한 기가! 삐진기가!"

"그럴 리가. 우리끼리 있을 때는 세이버나이트로 불러도 상관없어. 방금 그건 잠시 딴 생각을 좀... 미안."

흐으으으응.
고롱고롱 소리와 함께, 딱딱하게 뻗어 있던 그녀의 긴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일단은 용서.. 인가.

"무슨 용건이었는데?"

"용거언? 답답한 말투 하고는. 우리 라피드족처럼 시원시원하게 말할라믄 시간 꽤나 걸리겠구만. 왜 불렀겠노? 저기 저 시계 봐봐라!"

나는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시침과 분침이 모두 숫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하, 점심 시간이다 이거지.

"밥 했어. 지금 상 차릴게."

"그래그래, 말귀 잘 알아들어서 좋구만."

모우타운 변두리에 있는 IC 옆 공터를 새로운 '보금자리'로 선언한 타키온은, 그녀와 타키, 그리고 나까지 셋이 지낼 만큼 넉넉한 크기의 집을 지었다.
아니, 사실 내가 지었다. 타키온은 좌우대칭도 안 맞는 엉성한 그림을 설계도랍시고 가져와 내밀었을 뿐이고, 내가 외계 행성 생물체들에게 열심히 발품 팔아 가며 재료를 수급하고 제대로 된 설계를 맡기고 시공 발주를 했다. 뭐, 딱히 억울하지는 않다. 그녀와 딸이 살아갈 공간에 나를 식구로 받아들여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니까.
...굳이 덧붙이자면, 대출금은 셋이 같이 갚고 있으니까. 36개월 할부로.

"오늘 점심은 뭐꼬?"

타키가 눈을 빛내며 접이식 식탁을 가지러 가는 나를 따라온다.

"쉐도우 X가 먹던 신기한 배터리.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 조그만 보라색 꼬마가 요새 자주 들고 다니며 먹는 것의 정체는 수소 연료전지다. 리튬 이온 배터리만 먹어 본 타키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타키에게 잘 보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직접 출처를 물어 보니 전지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했다고 답해 주었다.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얻었을까. 역시 지구에 먼저 정착한 이들의 생활 방식에는 배울 점이 많다. 덕분에 알바 돈 들어오자마자 대량으로 구매했다.

"와! 와아! 그걸 산 기가? 어, 어떻게? 고맙다! 억수로 고맙다!"

신이 난 타키는 마당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공포도 분노도 없이 그저 즐겁게 달리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기 그지없지만, 식사 준비가 먼저겠지. 빨리 음식을 차려 주어야 기대하던 새 배터리를 먹어보지 않겠는가.
나는 거대한 평상에 제리캔 세 통을 올려놓고 작은 배터리들을 중앙에 둥글게 쌓아 올린다. 부탄가스 캔을 하나씩 배치하면 상차림 완료. 점심식사 시작이다.

"우리 타키가 이래 좋아하니 엄마도 참 좋다."

타키온은 방방 뛰는 타키를 잘 얼러 함께 상 앞에 앉았다. 냅킨을 전해주려 허리를 숙인 내 어깨를 툭 치며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역시 센스 있다니까."

뺨이 약간 달아오른다. 황급히 냅킨을 들이밀고 도로 직립 자세로 돌아간다. 못 봤겠지, 아마. 못 봤을 거야. 들키면 족히 삼 주는 놀려댈 게 뻔하다. 이렇게 휘둘릴 걸 알면서도 자꾸 괴롭히다니 악취미가 따로 없다. 휘둘려지는 게 싫냐면 그건 아니지만...

"엄마! 엄마, 이거 무지하게 맛있다!"

"우리 딸 입맛에 맞나 보네? 얼라라서 좋겠네. 엄마는 늙어빠져가지고 기름이 더 맛난다 아이가."

오늘의 메뉴 선정은 나름 고심한 결과이다. 수소 연료전지는 톡 쏘는 듯한 새콤하고 시원한 맛이라 타키온이나 나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면 한 끼 식사로는 부담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부드러운 목넘김의 경유를 메인으로 해서 자극적인 배터리라도 반찬 삼아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디저트는 액화석유가스. 텁텁함 없이 상쾌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노력이 통했는지, 점심은 아마도 성공적인 듯 하다. 모녀가 말 없이 얼굴을 아래로 처박고 먹는 데 열중하고 있다. 경험상 맛있고 만족스러울 때 나오는 패턴이다. 맛이 없을 경우 느릿느릿 먹으며 한 입 삼킬 때마다 둘이서 번갈아 가며 살벌한 혹평을 내뱉는다. 제일 최근에 실패했던 게 언제였더라, 두 달 전 저녁 식사? 나쁜 기억이 떠오르자 등골을 따라 냉각수가 줄줄 흐르고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건 악몽이었다. 잊은 채로 내버려두자.


식사를 마친 타키는 비클 모드로 마당을 요란스레 돌며 소위 '우다다'를 하다가, 친구들을 보러 가겠다며 그대로 집을 나섰다. 빨리 수소 연료전지 먹은 걸 자랑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게 분명했다.

"딱지 떼이니까 속도 제한 잘 지켜야 한다!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오는 것 잊지 말고!"

매우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타키가 남긴 자욱한 흙먼지를 향해 내가 외쳤다. 들리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속도 위반 딱지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한 번 떼일 때마다 무시하기 힘든 액수가 날아가니... 우리가 내는 벌금은 안나의 아버지가 시장을 맡고 있는 모우타운에 귀속될 터인데, 모우타운은 마키나인들의 정착을 돕는 차원에서 지원금을 지급하는 정책 또한 시행하고 있으니, 관점에 따라 우리 집은 받은 돈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 또한 데우스 마키나의 뜻인가?

"녀석, 너희 엄마가 돈 벌어오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모르고..."

"마, 고마해라. 개안타. 내는 항상 타키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안 카나. 저래 쓰라고 벌어 오는 거 맞으니까 너무 아를 닦달하진 말그라."

타키온이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뭔가 멋쩍은 기분이 된 나는 곧바로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니가 내 걱정해주는 건 알고 있지. 아이고, 귀여브라."

"귀, 귀엽... 뭐, 뭐가 귀엽다는 거야. 타키가 귀엽지 내가 왜..."

당황해서 빈 부탄가스 캔을 쳐서 넘어뜨리고 말았다. 타키온은 팔짱을 끼고 키득키득 웃는다. 아, 큰일이다. 이 상황에서는 얼굴이 달아오른 걸 숨길 수 없어.

"타키도 귀엽고 니도 귀엽다 아이가. 내는 참 복도 많제."

말문이 막힌 채 양손에 캔을 든 내 앞으로, 어느새 비클 모드가 된 그녀가 유유히 지나쳐 간다.
맞다, 오후 타임 뛰러 갈 시간이구나. 목까지 새빨개진 나는 쭈뼛대며 손을 흔든다. 남 두근거리게 만드는 데 재미 붙였나 봐, 얄밉게.
타키온까지 대문을 넘어 시야에서 사라지고, 혼자만의 시간이 왔다.

혼자 집에서 무얼 하고 지내느냐 하면, 생각보다 바쁘다. 일단 첫째로는 가계부를 써야 하고, 모아 둔 돈으로 식재료나 생활용품을 구입해 두어야 하며, 그 외 잡다한 요리, 청소, 분리수거, 재테크 그리고 잔소리까지가 모두 나의 임무이다. 나에게 악감정이 있는 자들은 식모살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삶이다.
더는 모르는 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더는 아는 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나의 목숨 역시 심판대 위에 세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하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이 일상을, 나는 절대로 잃고 싶지 않다. 그런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 마키나에서는 무력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름아닌 돈. 돈이 급하다. 집이 완공되었을 때는 축제 분위기였지만 시공업체가 명세서를 내밀자 장례식 분위기가 되었었지. 나는 상황을 타개해보겠답시고 무직 전업주부인데 대출을 풀로 땡겼다. 돌격대장 짬에서 우러나온 용기의 마지막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하는 수밖에 없다.
타키온은 개인택시 면허를 땄다. 규정 속도 이하로 달려야 하는 건 일반 택시와 똑같으나, 여차하면 로봇 모드로 변신해 손님을 안고 뛰어다니기도 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아 벌이가 제법 쏠쏠하다. 업무 특성상 집에 못 올 때가 많은 건 속상하지만...
타키는 장난기가 많고 집중력이 부족해 스피드를 살린 배달 기사를 내킬 때만 하고 있다. 준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밀키웨이에서 특히 일거리를 자주 주는 모양이다. 고마우신 분들이다.
나는 주식이나 펀드는 무서워서 못 건드리겠고, 세계를 누비는 친구들과 지구 전파보다 빠른 마키나인 기본 탑재 통신을 이용해 환차익을 노리거나, 집 근처에서 소소하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주로 하고 있다.
돈이 필요하면 내가 집에서 밥 하고 청소하고 장 보는 걸 인터넷 라이브 방송으로 송출해 보라고 누가 그러던데. 솔레이유와 준의 친구들 중 베라라는 아이였나? 이런 재미없는 남의 살림살이 따위를 보고 싶어할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나는 지구 문물을 잘 모르니 지구인인 그녀의 말이 옳겠지. 만약 저번 달에 이어 이번 달마저 적자가 난다면 속는 셈 치고 실행해 보는 걸로.

상을 치우고 빈 통들을 정리하고 나면 청소 시간. 활동적인 모녀가 몰고 온 온갖 먼지들을 쓸어담아 버려야 한다. 물청소는 매일 저녁으로 정했으니 지금은 빗자루질만으로 충분하다.
청소 후에는 쇼핑 시간. 마트로 향하기 전 가족 구성원이 다같이 수시로 작성하는 '사야 할 것 리스트'를 훑어본다. 흐음, '내후성 페인트', '엔진 오일', '유리 세정제', '페어패드'... 페어패드? 인간들이 쓰는 큰 화면의 전자 기기? 분명 타키가 은근슬쩍 써 놓은 것이다. 갖고 싶은 물건이 아니라 필요한 걸 쓰라고 누누히 말했건만! 그러고 보니 지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마키나인들이 비슷한 걸 가지고 다니는 걸 본 적 있다. 블루캅도 예전에 날더러 하나 장만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었지?
당장 사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더 이상 타키의 응석을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 타키온은 딸과 한번 헤어진 후 필요 이상으로 무르게 변해 버렸으니, 나라도 제대로 혼을 낼 줄 알아야 타키가 올바르게 자라지 않겠는가. 석 달간 벌금이 없어야만 페어패드를 사주겠다고 엄포를 놓을 것이다.

장을 본 후에는 아르바이트가 시작된다. 단골이 된 대형 마트 매니저가 친히 제안해 온 물류 센터 알바이다. 업무 자체는 전혀 복잡하지 않다. 인간 동료가 박스를 펴면 내가 물건들을 박스에 넣고, 인간 동료가 박스에 운송장을 붙이면 내가 그걸 테이핑 기계에 올리고, 내가 테이핑된 박스를 빠레뜨에 쌓아 놓으면 인간 동료가 정해진 수량만큼 랩핑하고, 함께 랩핑된 물류들을 가득 실은 빠레뜨를 끌고 배송 트럭에 가져다 넣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 반복, 반복. 단순한 일이지만 동료들이 선량해 같이 지내면 즐겁고, 무엇보다도 물류 센터가 집과 가까워서 마음에 쏙 들었다. 비클 모드로 십오 분 이내에 오갈 수 있는 거리라 안심이 된다.

딱 하나 문제인 것은 시간이다. 이놈의 물류 알바는 언제 시작하든 반나절 분량이라 아무리 빨리 마쳐도 저녁 식사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다. 타키온 모녀는 식사 시간이 늦어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안 그래도 유가가 치솟는 마당에 이 알바를 그만두면 가계부가 펑크나게 생겼고...
애초에 마키나인의 주식이 지구에서 원자재, 사치재로 통용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전혀 물가 안정의 대상이 아니다. 불안정한 벌이로 비싼 에너지원을 매일같이 구입해야 한다니! 솔레이유와 그녀의 부유한 가족들이 몰래 가져다 주는 비상식량이 아니었다면 굶을 뻔한 날들도 있었다. 며칠 전 글로버에게 끌려가 억지로 참석한 아저씨회에서 잔뜩 취한 블랙 후크 녀석이 자기 부하가 다음 시장이 될 거라며 호언장담했었지? 마키나인 주민등록이 완벽히 성사되어 진짜로 버스터갤런이 시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면 반드시 투표하러 갈 것이다. 악명 높은 해적에게 모우타운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지는 차치하고, 적어도 식량 문제만큼은 해결해 주지 않을까.

불안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한다. 다섯 시 이십 분.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해도 앞으로 이십 분은 더 해야 하는데, 사십 분에 마치면 거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해 버린다. 타키온은 일 때문에 늦게 온다 쳐도, 친구들과 신나게 놀아 배가 고파져 있을 타키는 성질을 부리겠지. 곤란하네, 곤란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민 없이 요리를 준비할 수 있도록 저녁 메뉴를 미리 생각해 둔다. 일단 창고에 있는 휘발유를 꺼내 메인 디쉬로 삼자. 휘발유 종류는 오래 보관하면 상하기 마련이라 빨리 먹어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뭐가 좋으려나. 석탄? 바이오디젤? 시간이 촉박하지만 대충 준비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기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맛있는 반찬 하나쯤은 내어 주어야 한다.
고민하던 와중 최근 지붕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전기가 모이는 속도가 느린데다 양도 시원찮아 설치 첫날 확인해보고 쭉 방치해뒀었다. 덕분에 며칠간 태양빛을 듬뿍 받았으니 축전지를 회수하면 삼인분 정도는 나올 것이다.

여섯 시 이십 분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영 운이 안 따라 주는지 안 그래도 일이 늦게 끝났는데 건널목마다 빨간불까지 켜지더니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집에 아무도 없다. 타키가 늦는 게 조금 걱정되지만, 아직 날이 밝으니 뭐라 하기엔 이르다.
창고에서 휘발유가 든 말통을 꺼내 온다. 냄새를 맡아 보니 아직은 멀쩡하다. 주방에 가서 소분하고 대형 냉동고에 넣어 두면 준비 완료. 휘발성 연료들은 차갑게 먹는 게 식감이 좋다.
다음으로는 대망의 태양광 패널. 그새 먼지가 쌓인 축전지를 들어올려, 용량을 확인하고 아주 조금만 맛을 보았다.
음, 나쁘지 않아. 이건 타키온이 꽤나 좋아할지도.
짭짤하면서도 매콤달콤한 풍미가 일품이다. 타키온은 그걸 '얼큰하다' 라고 불렀다. 언젠가 자신이 건넨 이런 맛의 가스를 켁켁거리며 마시는 나를 보고, 스타가디언들은 맛대가리 없는 밥만 처먹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고 웃어댄 적이 있었다. 스타가디언 배급식이 하나같이 밍숭맹숭하고 텁텁하긴 하지. 군의관 말로는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식단이라는데, 맛이 별로인 건 사실이었다.
하여튼 상당히 괜찮은 맛이야. 다만 직류보다는 교류가 좀 더 어울릴 듯한 느낌이므로, 정류 과정을 거쳐 밥상에 내놓도록 한다.

식탁을 다시 꺼내고, 말통을 창고에 돌려놓고, 휘발유를 퍼먹을 국자를 하나씩 배치한 다음 축전지에 정류기와 인버터를 연결해 각자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게 하면 끝. 오늘의 저녁 상차림도 완료되었다.
한숨 돌린 나는 시계를 보았다. 어이쿠, 벌써 여섯 시 오십 분. 창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타키가 명백히 늦고 있다!
따로 연락을 해 보려던 참에, 기증받은 중고 TV에서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타키네 집이죠?"

구릿빛 피부, 붉은 머리의 여성. 누구였지. 저 멀리 포르카카에 사는 메탈브레스의 주인 페루루... 의 어머니.

"그게, 타키가 우리 동네에서 다른 애들이랑 경주를 하다, 플래시벡터랑 부딪치는 바람에 다쳤지 뭐니."

카메라가 돌아가자, 우에엥 우는 소리와 함께 범퍼가 우그러지고 타이어 하나가 빠진 타키가 화면 가득 비춰졌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아직 움직이긴 힘든가 봐. 내일 아침에 모우타운의 에드 씨와 메가앰블러가 왕진을 와 주기로 했단다. 그러니 오늘은 임시로 우리 집 차고에서 재우도록 할게. 아, 생명에 지장이 있는 큰 부상은 아니라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타키의 저편으로 아예 반파된 플래시벡터와 실실 웃다 기간트렉스에게 머리를 얻어맞는 레드블리츠, 다 죽어가는 형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고 있는 스파크비트가 보였다. 젠장,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예, 죄송합니다. 저희 타키가 포르카카까지 가서 사고를..."

"아유, 우리가 미안하지. 애들이 좀 신사적으로 놀면 좋을 텐데 허구한 날 쌈박질이나 하더니 다른 집 딸래미까지 끌어들이고 말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얘들아!"

나는 타키에게 아주 길고 신랄한 잔소리를 한 뒤 내일부터 일주일 간의 외출 금지령을 선고했다. 마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타키가 비명을 지른다. 정황상 순수하게 타키의 잘못만은 아닌 듯했지만, 회복 겸 자중하라는 의미에서 한동안 멀리 쏘다니지 않는 편이 좋겠지. 기분이 좋다고 생각 없이 방방 뛰는 습관을 어서 고쳐야 할 텐데.

영상통화를 마치고, 텅 빈 집 안에서 이제 어쩔지 고민한다. 타키온에게 알려야 하나? 하지만 영상으로 본 타키의 상태는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 보였고–타키와 충돌한 그 포뮬러카는 상태가 심각해 보였지만–쓸데없이 심란한 이야기를 업무 시간에 전해 주었다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괜히 우울해진다. 냉동고를 열자 휘발된 가솔린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진다. 이건 꺼내면 바로 먹어야 되는데. 제리캔도 열었으니 최대한 빨리 비워야 하는데.
다른 건 치울 생각조차 안 하고, 그저 빨리 처리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상에 앉아 휘발유 세 그릇을 꿀꺽꿀꺽 비운다.
맛이 없었다. 아무리 맛있게 준비해도, 엄청난 재료를 써도 혼자 먹는 밥은 영 맛이 없었다. 마치 현역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와일드카드봇 섬멸 임무를 끝내고 동료와 적의 시체가 즐비한 전장에서 텅 빈 마음으로 먹는, 아무 맛도 향도 없던 그 식사 같다.
울적함이 심화되기 전에 빨리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바쁘면 대부분의 정신적 문제는 해결되는 법이다. 빈 그릇을 차곡차곡 쌓아 한데 모아 놓고, 가계부를 펼쳐 이번 달에 내야 할 이자와 지출과 수입에 대해 고민한다. 저번 달 적자가 이월되어야 하고, 외계인 4대보험 적용이 이번에 시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만큼을 제하고 우리 가계 총수입을 고려하면...

 

 

"–이트야. 사바나드야."

"아."

눈을 뜬다. 타키온이 평상 맞은편에서 내 이마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잠들었나? 언제? 역시 회계는 영 내 체질에 안 맞아.

"와 여어서 자고 있노. 불쌍하게시리."

"아, 자려던 거 아닌데..."

시계를 본다. 새벽 2시. 많이도 잤네. 나는 한숨을 쉬고서, 엎드려 자느라 살짝 구겨진 가계부를 정리해 넣었다.

"니도 고생한다. 내가 벌이가 시원찮아갖고 돈 굴리기 억수로 힘들끼다. 살림하랴 곳간 지키랴 돈 굴리랴 알바하랴 맨날 바빠 노니까 피로가 쌓여서 잠이 솔솔 오제."

"...딱히."

고개를 슬쩍 돌려버린다. 한밤중에 왜 분위기를 잡고 난리인지. 나를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서 어쩔 심산일까. 혼자 들뜨게 해놓고는 비웃을 작정인 걸까.
그녀가 푸훕, 하고 웃는다.

"에이, 새침떼기 같으니라고."

"내가, 내가 뭐."

진중한 톤으로 받아쳤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영락없는 투정이었다. 어쩔 수 없나. 타키온과 잘 지내는 법 같은 건 모른단 말이다. 그녀와 마주했을 때 나의 행동은 목숨을 건 결투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고, 존중과 연민과 동경과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정제되지 않은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걸 오롯이 느끼면서도 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는 검을 휘두르는 것 하나밖에는 몰랐던 탓이다.
그러나 타키온은 내가 모르는 수없이 많은 마음의 형태와, 서로에 대한 살의에서 시작해 한쪽의 참수로 막을 내렸던 관계를 새로 엮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니는, 니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이가. 그쟈?"

"... ..."

"니가 잘못을 태산맨치로 하긴 했제. 근디 온갖 악랄한 작자들이 지구 와서는 마음 고쳐먹고 새출발 하고 있지 않드나. 니라고 못할 게 있겠나."

"미움받는 건 각오했어.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 생각이고 따돌려지게 되어도 어쩔 수 없겠지. 난 그냥..."

"그냥?"

"그냥 너만... 네가..."

"내가아아?"

타키온은 익살맞게 히죽거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어메탈이 콩닥거리다, 아직도 이쪽 보고 있나 궁금해져서 슬쩍 쳐다보았을 때 눈이 마주쳐버려서, 통제를 벗어나 쿵쾅거리기 시작하니 이제 견딜 수가 없어서,

"바, 밥! 밥 먹어!"

쾅! 아직 상 위에 있던 태양열 축전지를 넙죽 내밀었다. 숙인 머리가 평상에 부딪치며 빈 그릇이 흔들린다.

"밥? 새벽 두 신데."

그녀가 한쪽 눈을 치켜 뜬다.

"태양광! 지붕에 달아 놓은 그거야. 태양열 패널. 네가 좋아할 맛이니까 꼭 먹어 봐."

간신히 화제를 돌렸다. 타키온이 축전지를 만지작거리며 관찰하는 틈에 나는 창고로 달려가 아직 휘발유가 남아 있는 말통을 가져왔다.

"이거랑 같이 먹으면 돼. 안 시원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재빨리 그릇 하나를 씻어 휘발유를 붓고, 국자를 퐁당, 축전지 전압 확인. 순식간에 그럭저럭 세팅된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그럼 노력이 가상하이 함 맛이나 봐 주까.”

나는 타키온이 국자를 집어 휘발유 한 숟갈을 떠먹고 축전지에 연결된 전선을 잡아올려 전기 에너지를 음미하는 광경을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호오! 얼큰하구만.”

“그, 그렇지?”

남은 걸 다 먹어도 괜찮겠냐는 듯, 그녀가 통을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날씨 더워지기 전에 빨리 먹어야 돼."

"그랴. 아, 타키 소식은 들었다. 요 가시나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싶어 전화해 보니 하다하다 바다 건너서까지 광대짓을. 쯧쯧."

"미안. 내가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데..."

"고마해라 안 카나. 뭔 눈만 깜빡이도 미안타 칼라고."

투웅– 타키온이 내 정수리에 딱밤을 때린다. 제법 묵직한 한 방이었다. 초점이 순간 흐릿해졌다가 서서히 돌아온다. 방금 설마 사과했다고 혼난 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기를 들이키던 그녀는 내가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않는 것을 알아차리자 몸을 내밀어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처럼 과장된 동작이 아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와 울라 카노. 내한테 얻어맞았다고 동네방네 이르러 다닐끼가?"

운다니?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런 건 아냐. 알잖... 알면서."

"야가 뭐라카노. 내는 모른다. 내는 암끼도 모른다."

즐거운 듯한 목소리. 정말, 다 알면서. 그녀는 언제나 행동으로 모든 걸 보여주었다. 숙적에게 붙은 불필요한 정은 검을 놓친 나를 두고 등을 돌려 버리는 자비로, 가족과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파괴신을 부른다는 극단적인 형태로.
딸과 자신의 영역에 나를 넣어준다는 건, 이렇게 매일 내가 치워놓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내가 준비한 식사를 먹어준다는 건, 질리지도 않고 실없는 장난을 치거나 김빠지는 농담을 던져오는 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으응?"

"뭘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난. 알려줘, 타키온."

그녀의 눈이 가늘어진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화났어?"

"눈이 삐았네. 이게 뭔 화난 얼굴이고. 사랑스러워서 확 때리고 싶다는 얼굴이지."

"때리고 싶다니 역시 화난 거 아니야?!"

"그랴, 그런 점도 바보같고 귀엽구만."

후루룩, 하고 마지막 전기 1와트까지 탈탈 털어 마신 타키온은,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것만으로 말로써 확인받고 싶어하던 내 나약한 마음은 한풀 사그러들었다.

"하모, 지금처럼만 하믄 문제없다."

"지금처럼 하는 게 뭔데?"

그녀가 깔깔 웃는다. 탁자를 퍽퍽 쳐 가며 웃는다. 아니, 난 정말 몰라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뭐긴 뭐겠노. 마, 밥이나 차려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