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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밖에서

Summary:

루케니랑 시씨만 등장하는 시씨토드

Work Text:

하나의 재판은 하나의 공연이나 다름없다. 루이지 루케니의 이해로는 그랬다.

'우리 가문의 큰 영광이네.'

'그 아비만 아니었다면.'

루도비카가 온 일가친척을 불러 모으는 장면이 끝나면 늘 머리가 울렸다. 자기 차례를 마친 루케니는 무대 옆의 높다란 구조물을 굳이 올라가서 쪼그려 앉았다. 혼자 쉴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쉬어 두어야 했다.

"뭐야, 저건."

그런데 웬걸, 주인공이 무대 밖 구조물을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외줄 위에서 춤추는 걸 보여주겠답시고 높다란 기둥을 오르고 있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도록 반복한 재판이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모르는 척 넘어가면 없던 일이 되지 않을까.'

루케니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 순간 날듯이 다가온 소녀가 그의 옷소매를 단단히 붙잡았다.

"여기가 어디야?"

무슨 대답을 해야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공주님은 왜 여기 있어?"

"모르겠어, 외줄을 타려고 오르다가⋯ 아."

루케니는 그저 짜증스러웠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그냥 뿌리치고 가면 안 되나? 아니, 애초에 재판이라는 게 이딴 식으로 어그러져도 되는 거냐고. 이 따위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에 그는 답이 그친 것을 제때 알아채지 못했다.

소녀가 무대 아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 놀랍지도 않네.”

이즈음이면 무대 저 아래에서는 죽음이 배경 뒤를 서성이고 있을 터였다. 굳이 고개를 빼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검은 왕자님의 겉가죽을 뒤집어쓰기 전의 모습이라면 죽어도 사양이었다. 저 아가씨처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이라도 깔린 양 바라보는 게 비정상이었다.

소녀는 힘주어 붙잡고 있던 소매를 놓고 구조물 가장자리로 몇 걸음을 옮겼다. 외줄이 시작되는 곳에 다다르자,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이는 어디로 가?”

“그리 궁금하시다면 직접 가서 물어보시지요, 공주님. 내가 뭐 아는 게 있어 보여요?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시네!”

소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새초롬한 옆모습에 루케니는 코웃음을 치며 부러 딴소리를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없는 자리에선 죽음 폐하라고 욕도 못 할 것은 없었다.

“이 공주님은 취향 한번 괴상하지, 소름 끼치지도 않나 봐.”

루케니는 공주님도 줄칼을 건넬 때의 모습을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둥, 자기는 가까이 가기도 싫다는 둥 묵혀뒀던 불평을 쏟아냈다. 소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한참을 떠들던 루케니만 혹시나 저 아래까지 소리가 들릴까, 지레 겁먹고 목소리를 점점 줄였다.

소녀가 다시금 무대 아래로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말해 줘,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지?”

루케니는 팔짱을 끼고 난간에 몸을 기대며 딴청을 피웠다. 죽음은 이 철부지 공주님이 잠시 붙잡기만 하면 좋답시고 평생 곁을 맴돌 터였다. 그쯤이야 이 아가씨도 곧 알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더래도 나서서 알려 줄 마음은 물론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나는 몰라요. 평소에는 알아서 잘만 하더니만 왜 이러셔! 하여간 내 눈에 저건 거지꼴보다 못한데 말이야, 허구한 날 왕자님이니 뭐니 하고-"

소녀는 말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무대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외줄에 올라타고, 춤추듯 걸음을 내딛고, 다시금 죽음을 바라보던, 그 망설임 없던 잔상이 한동안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으-래. 결국은 똑같구먼. 죽음과 사랑에 빠지고 또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시겠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어!"

다시 지겹게 반복한 항변을 늘어놓을 차례였다. 루케니는 한숨을 내쉬며 무대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