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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s:
Relationships:
Characters:
Language:
한국어
Series:
Part 2 of 트릭스터
Stats:
Published:
2023-03-13
Completed:
2023-03-13
Words:
4,290
Chapters:
2/2
Hits:
36

동맹 성립

Summary:

트릭스터 컨벤션 이후, 백란이 로키와 재회하다

Chapter Text

로키는 아스가르드가 지나치게 발전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다고.
그때는 아직 로키가 오딘의 둘째 아들, 아스가르드의 왕자이고 토르의 형제라 불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평화롭고 좋은 시기였다.
그러니 그의 그런 지적에 귀를 기울였어야 마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시기였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로키를 떠올리고 토르는 그만 울적해져버렸다.
로키가 살아있었다면 오늘 분명 기뻐했을 텐데. 점잖은 척 하면서도 녹색 눈을 호기심으로 빛냈을 텐데.
그 좋은 시기가 끝나고 수많은 비극이 있었다. 그 비극 대부분이 로키의 소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토르는 로키의 옛 불평 중 하나가 사실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신도 아스가르드도 지나치게 정체되어 있었다. 미드가르드든 또 다른 세계든 더 많이 접하고 배워야 했다.
그래도 지금의 아스가르드는 자신이 힘으로 적을 때려눕히는 것밖에 모르던 그 시절과는 꽤 달라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난 뒤론 보다 자애롭고 현명한 군주가 되셨다. 로키와 어머니, 제인의 일로 내심 아버지를 원망하던 토르였지만 지금의 아버지를 보면서는 적어도 또 ‘이 늙은 바보!’라고 외칠 충동은 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와 세계수 너머의 다른 세계와 수교하기로 결정한 것도 오딘이었다. 미드가르드를 경유하면 이제까지보다 훨씬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었고, 토르 역시 미드가르드에 깊이 관여하는 다른 세계라면 모른 척할 수 없기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다행히 그쪽도 평화와 질서를 추구하는 선한 세계라 수교는 순조로웠다. 오늘은 그 사절단이 처음으로 비프로스트를 밟은 날이었다.
사절로 온 천계의 인물들은 낯설 뿐 아니라 위풍당당한 모습들이었다. 그들도 내심으로는 긴장했다고 알 수 있을 만큼은 토르도 요령이 생겼지만 그래도 이 긴장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양피지에 금박으로 글씨를 새겨 보낸 서한의 답으로 비단에 검은 잉크로 쓴 답이 왔을 때도 느꼈듯이 지금도 하나부터 열까지 낯설고 신비한 모습이었다. 옷차림도 예절도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맞아야 하나 당황한 전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로키가 있었다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영리하고 온갖 잡지식을 다 알아두는 그라면 보다 능숙하게 응대하는 한편 새로운 지식을 흡수할 기대감에 물 만난 고기 같았을 것이다. 미드가르드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경험에 비추어 조심스럽게 응대하며 토르는 정말 로키가 그리워졌다.
그러다보니 사절들 중 거의 유일하게 화사한 미소를 띠고 토르 앞에서건 오딘 앞에서건 부드럽게 응대하는 여우 요괴가 진심으로 예뻐 보였다. 아스가르드에 로키가 없는 대신 천계에 천호가 있어 눈치빠르게 분위기를 가다듬고 서로 풍습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이 날 때마다 악기를 조율하듯 상황을 수습했다.
물론 보통 여우는 아니었다. 황금빛 털에 감싸인 아홉 갈래 꼬리는 여우 요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높은 영물인 증거였다. 보기엔 어린 티 덜 벗은 소년이지만 천년이나 미드가르드에 머물며 인간들을 보호하고 악을 징벌한 존재라고도 했다.
로키 생각을 하고 봐서인지 천호를 보고 있으면 로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끄러운 화술과 재치, 순간순간 낯선 것이 나타날 때마다 천성을 어쩌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호기심. 아직 성년이 되기 전의 로키를 보는 것 같았다.
로키가 저만큼 선량한 성격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까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여우 요괴와는 말이 잘 통했겠지. 적어도 로키가, 다크엘프들의 침략 때 명예를 씻고 살아서 함께 돌아오기까지 했더라면.
“귀한 손님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소.”
오딘의 목소리에 토르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회한에만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천계의 근엄한 사절들도 조금씩 분위기가 풀어졌다. 아무렴, 좋은 술과 맛있는 고기를 싫어하는 족속이 있을 리가. 소녀시절의 시프보다도 더 서릿발 같은 기상을 빛내고 있던 청룡 장군도 열심히 튀김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흐뭇해져서 토르도 벌꿀술을 들이켰다. 오딘도 친구들도 다 웃는 얼굴이었다. 아스가르드에 강력하고 명예로운 동맹이 탄생하는 날이었다.
분위기가 꽤 무르익었을 때 천호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토르에게 다가왔다.
“아스가르드의 왕자, 오딘과 프리가의 아들이며 묠니르의 주인이신 강대한 토르 전하를 뵙습니다.”
계속해서 천신들을 대신해 외교적인 대화를 풀어가던 천호인지라 다들 그쪽을 주목했다. 동맹의 앞날을 위해 중요한 제안을 하든 그냥 토르의 명성에 걸맞는 찬사를 늘어놓든 기꺼이 들어줄 마음으로.
“아스가르드 땅을 밟아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나 전하의 위명은 일찍이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호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아스가르드 식 술 항아리가 아닌 작고 홀쭉한 흰색 호리병은 예쁘긴 한데 술이 많이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전하의 동생 되시는 강대한 마법사이자 대현자, 하늘을 걷는 이 로키 전하에게 들었지요.”
토르의 손에서 술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챙 하는 소리가 얼어붙어버린 연회장에 울렸다.
“로키라고.”
“예. 제가 이전 인간계에 있을 때 그분을 뵙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헤임달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로키가 죽기 이전의 일이며 즉 로키가 지금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모든 전사들이 제각기 안도하고 실소했다.
토르는 웃지 않았다.
“저는 인간계에 있는 동안 대흉대악의 음모로 몇 번이나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여, 끝내는 가솔들과 짐짝 하나를 전부 거두어 달아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절박한 때에 우연히 마주쳤지요.”
천호는 태연히 설명했다.
“그분은 이 작은 여우를 미천하다 하여 괄시하시는 대신 후히 대접하시고 위로와 지혜가 되는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이 자리에서 그분께도 술을 올리고 그때의 은덕을 기리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로키 전하는 이 자리에 보이지 않으십니까?”
토르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뭐라 해야 좋을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로키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했다.
오딘은 로키가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인정해주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만약 토르 자신이나 여기의 다른 전사들 중 누군가가 얽힌 일이었다면 모두 입을 모아 그 전사의 자비를 칭송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누군가라면 더욱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아스가르드가 무엇을 잃었는지 한탄했을 것이다.
지금 연회장엔 로키를 칭송하거나 추모하는 대신 어색한 침묵만 내려앉아 있었다.
천호도 자신의 말이 뜻밖의 반응을 불러들였다고 깨달은 것 같았다. 내내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 누가 설명해달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토르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로키가 그런 일을 했다고?”
토르보다 먼저 오딘의 목소리가 조용해진 연회장에 울렸다.
“그러하옵니다.”
천호가 오딘을 향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알릴 수 없는 외로운 싸움 중에 흔치 않은 위안이었지요.”
“그대는 미드가르드에 오래 머물렀다 했지. 그 이후로 로키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는가?”
“저를 위협하는 대흉대악에 맞서 싸우는 일이 너무나 초급하여, 천계로 돌아오기 직전 얼마 동안은 인세의 다른 소식에 그만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제 견문이 좁아 무례를 저질렀다면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허나 아스가르드에서 로키 전하를 칭송하는 것이 무례가 될 일인지 이 여우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무엇을 용서한단 말인가.”
오딘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대가 그대의 숙적과 싸우는 동안 로키 역시 그에게 주어진 시련과 맞서 싸워야 했지. 안타깝게도 그는 그 싸움으로 명예와 목숨 중 하나를 잃어야 했다네.”
천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오딘이 잔을 들어 벌꿀술을 가득 부었다. 그리고는 천호에게 손짓했다.
“아들의 죽음을 아비에게 상기시키는 일이 무례라면 그 아들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덮고도 남음이 있지. 가까이 오게.”
천호가 오딘에게 다가갔다. 오딘이 술잔을 내밀자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아스가르드를 위하여. 죽음으로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수호한 모든 영웅들을 위하여.”
오딘이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다른 전사들과 천신들도 잔을 들었다.
그 잔들이 비워지고 연회장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로키의 이름을 다시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토르는 그렇게 쉽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오딘은 ‘죽음으로 수호한 모든 영웅’이라 말하며 로키를 직접 언급할 기회를 피해버렸다. 다크엘프 침공 이후 항상 그런 식이었고 다른 친구들과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키가 해온 짓들이 있으니 그들의 심정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달랐을 것이다. 역시 로키에게도 영웅의 자질이 있었다고, 기뻐하는 동시에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
토르는 여전히 오딘 곁에 서 있는 천호를 바라보았다. 오딘이 내린 벌꿀술을 마시고 답례로 술을 따르는 옆모습은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러웠다. 미드가르드에서 콜의 아들을 비롯해 저런 표정으로 속마음을 감추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천호에게 가까이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 미드가르드로 쫓겨났을 때 이후 온갖 일들을 겪으며 생긴 조심성이 당장 나서려는 충동을 막았다. 오딘과 대화중이라고 해도 그는 끼어들 자격이 있지만 지금은 로키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오딘뿐 아니라 아스가르드의 다른 누구도 없는 자리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편이 여러 모로 나았다.
천호는 오딘을 상대하느라 그런 토르의 심정을 알아줄 여유가 없는 듯했다. 신비한 향이 나는 호리병 속의 술을 다 따르고 오딘에게도 벌써 세 번째 잔을 받았다.
그 세 번째 잔을 입가에 갖다댄 순간 천호의 금빛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계속 천호를 주시하고 있던 토르는 눈치챌 수 있었다.
“토르 전하?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천호가 놀란 기색을 거두고 토르를 마주보았다.
“빤히 쳐다보시는 모습이 잔에 비쳐서 놀랐습니다.”
자신이 놀라게 했을 줄이야. 토르는 머쓱해져서 일어났다.
“용건이 있다면 이리 와서 말하지 그러느냐.”
오딘도 인자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토르는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오딘의 옥좌로 올라갔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천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받아주었다. 옆에서 오딘이 거들었다.
“네가 로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게로구나. 내 눈치 보지 말고 이야기 나누려무나.”
그래도 오딘은 토르가 로키를 추모하는 것까지는 봐주실 모양이었다. 토르는 천호와 오딘 곁에 앉았다.
“로키를 아는 다른 세계 존재를 본 건 처음이라, 묻고 싶은 것이 많다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어벤저 동료들도 거기 해당되지만 일단 그렇게 설명했다. 모처럼 로키를 좋게 기억하는 인물을 만났는데 나쁜 이야기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그를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아스가르드도 천계도 아닌 곳이었지요.”
천호가 미소지었다.
“저는 절박하게 은신처를 찾는 중이었고 로키 전하 역시 그랬습니다. 아스가르드에서 다소 불미스런 일을 겪은 듯 했는데 자세한 말씀은 해주지 않으시더군요.”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나 은신처를 찾을 때라면 토르도 언제인지 짐작이 갔다. 로키가 대관식을 망치고 아버지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신과 미드가르드까지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비프로스트를 이용해 요툰하임을 파괴하려 했을 때.
자신은 그때도 로키가 죽은 줄만 알았다. 비록 살아 돌아온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악당이 되어있긴 했어도, 지금까지도 문득 그때처럼 이번에도 로키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하곤 했다. 허공으로 떨어져 사라져버린 그때와 달리 이번엔 눈앞에서 죽어 시신을 확인했는데도.
“그때 일이라면 나도 토르도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깊이 후회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토르가 침묵하는 동안 오딘이 부드럽게 설명했다.
“쫓겨나 방황하던 로키가 만난 상대가 자네여서 그나마 다행이었군. 분명 로키와 공감할 부분이 많았겠지?”
“그랬습니다.”
천호가 싱긋 웃었다.
“그때 저도 전하처럼 악귀나 제 적이 아닌, 천계의 눈을 피할 문제로 걱정이 태산 같았거든요.”
“천계를 피하려고? 어째서?”
토르가 기겁했다.
“그대도 천계에 잘못을 저질렀는가?”
“제가 아니라 제 친우가, 앞뒤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정의감으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천호가 태연히 답했다.
“악행은 아니었습니다. 누굴 해치는 일도 아니었고요. 절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일이었으나 덕분에 저도 그도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랬나?”
친구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악행도 아닌 일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괴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토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 법이지. 그 친구가 눈앞의 위기만 보지 않고 네게도 사정이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알아줬더라면 그런 일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바로 그러합니다.”
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지혜의 신이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으십니다. 그냥 솔직하게 제게 미리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그가 저를 구하려고 움직였다는 것이 제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서 그냥 넘어갔지만 역시 바보를 챙기다가 저까지 바보가 되는 경험은 자주 할 것이 못 됩니다.”
천호가 로키를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면까지 닮다니. 토르는 그 친구 쪽이 조금 불쌍해져서 물었다.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되었나? 친구가 벌을 받지는 않았나?”
“그랬다면 저도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지요. 다행히 그 일을 심판하러 온 추심관이 호의적으로 판단해주어 저도 친구도 고비를 넘겼습니다.”
“멋대로 행동해 위기를 자초한 것은 친구인데 그대는 당연한 듯이 자신의 운명과 결부짓는군.”
오딘이 지적했다.
“생사를 함께할 정도라니 아름다운 우정이로다.”
“그의 원수가 저의 원수이기도 한지라 그가 죽는다면 저 역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필요 없네.”
토르가 다시 나섰다.
“우정과 신의는 아스가르드에서도 고귀한 미덕이라네. 그럼 그 원수는 이제 갚은 건가?”
“그렇습니다. 원수는 갚았고 의혹도 누명도 전부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게 다 잘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천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때 로키 전하께서는 사정을 듣고 당신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걱정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일은 이제 잘 끝났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토르도 함께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로키가 이 자리에서 들었다면 분명 기뻐했을 거다.”
오딘이 천호에게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저 역시 로키 전하께서 무사히 당신의 자리를 되찾기를 원했습니다.”
천호가 토르를 돌아보았다.
“로키 전하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토르는 당황했다. 로키가 저지른 악행들을 거짓으로 축소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었다. 그럴 말주변도 없었다.
그렇다고 오딘이 먼저 설명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스가르드로 압송해온 로키를 오딘이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생각하면.
“로키는......그만 악의 길에 빠지고 말았다네.”
토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계의 다른 악한 세력과 손잡고 미드가르드를 침공했었지. 그가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천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 나는 전혀 몰랐고, 왕의 재목이 되기에도 한참 부족한 주제에 대관식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지.”
다행히 오딘은 당장 끼어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흰 눈썹 아래의 외눈은 이참에 토르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교훈은 얻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을 깨달았을 땐 로키가 내 적이 된 뒤였어. 나는 화가 난 나머지 그를 다시 설득하거나 해보지도 못하고 싸웠고, 그래도 생포했으니까 아스가르드에서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지. 음, 그 도중에 로키가 허공으로 사라져 죽은 줄만 알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대가 만났던 때가 아마 그때일 거야.”
“예. 로키 전하께서 제게 한 이야기를 봐도 그때 같군요.”
“로키가 뭐라고 말하던가?”
토르는 긴장했다. 스스로 반성하는 것과 로키의 입으로 비난받는 것은 차이가 컸다. 그때의 로키라면 한창 토르와 오딘을 원망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역시 전하의 출신 때문에 상심이 커 보였습니다.”
천호가 기억을 더듬느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아스가르드와 아무 상관도 없는 미력한 존재이기에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위태로운 지경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 당시 인간계에 있던 제 거처로 모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악의 유혹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을.”
“그대는 그때 천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오딘이 끼어들었다.
“다른 세계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친 존재를 숨겨줄 때가 아니었지. 그런 걸로 후회할 필요 없네.”
로키를 돕고 타락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린 일인데 저렇게 쉽게 말하다니 역시 아버지는 여전히 로키에게 너무하신다. 토르는 조금 울컥했다.
“그래도 로키는 결국 스스로 명예를 되찾았어. 다크엘프들의 침공으로부터 아스가르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랬군요.”
조금 놀란 눈으로 토르를 바라보던 천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 전하께서는 진정 로키 전하를 생각하시는군요.”
“어, 그렇게 보이나?”
로키에게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었다. 서로 원망하고 다투고 공동의 적 앞에서도 완전히 믿을 수 없어 경계하던 게 마지막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와서 그런 말을 들어봐야 기뻐해도 좋은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로키가 혹시 내 이야기도 하던가?”
“예.”
천호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했다.
“했지요. 아주 약간, 지나가는 말처럼 했을 뿐이지만요.”
내내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천호가 갑자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토르는 철렁했다.
“날 원망하던가?”
천호는 이제 눈에 띄게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때 로키 전하는 무척 상심하셨던지라......제가 함부로 말을 옮겨도 좋을지.......”
토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네. 굳이 말 안 해도 되네.”
대체 얼마나 심한 말을 했으면 저럴까. 자신이 실제로 로키에게 들었던 온갖 싫은 말, 비난, 조롱 등등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심한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바보를 상대하다가 자기까지 바보가 되었다고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혹시 천호는 로키가 가끔 그랬듯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토르가 고개를 들고 천호에게 한 마디 하기도 전에 오딘이 토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것은 한 무리의 사절단이 아니냐. 왕자가 한 사람만 오래 붙들고 있으니 천호가 힘들어 보이는구나.”
토르는 얼결에 술잔을 받아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사절단에는 천호보다 지위가 높고 중요한 인물들이 많았다. 거의 통역사나 다름없이 활약중이라고 해서 천호하고만 대화하는 건 대단한 실례였다.
오딘이 눈빛으로 재촉했다. 토르는 머쓱해서 일어났다.
“동방청제께서 토르 전하와 잘 맞을 것 같군요.”
천호도 거들었다. 토르는 아직 일정이 넉넉히 남아있고 천호와 이야기할 기회 역시 얼마든지 또 오리란 점을 위안삼을 수밖에 없었다.
오딘도 그렇게 말해놓고 당신은 천호만 계속 붙들고 대화하지는 않으셨다. 천호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놓아주고 만찬의 주인답게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갔다.